2025년 11월 30일 일요일
가해[대림 제1주일] 사람의 아들의 재림 (마태24,37-44)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해)를 시작하는 오늘, 교회는 마지막 때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세상이 끝나면 그것으로 우리 모두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시는 주님에게서 구원을 얻습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늘 깨어 있도록 합시다.
제1독서<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모아들이신다.>(이사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화답송>시편122),1-2.4-5.6-7.8-9(◎1) ◎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
○ 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네. 주님의 지파들이 올라가네. 이스라엘의 법을 따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네. 그곳에 심판의 왕좌,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
○ 예루살렘의 평화를 빌어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안하리라. 너의 성안에 평화가 있으리라. 너의 궁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 ◎
○ 나의 형제와 벗들을 위하여 비노라.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 우리 하느님의 집을 위하여 너의 행복을 나는 기원하리라. ◎
제2독서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습니다.>(로마13,11-14ㄱ)
11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12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14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복음<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마태24,37-44)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대림 제1주일 제1독서 (이사2,1-5)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4)
이사야는 2장 2절에서 종말에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성전으로 모여들 것을 예언하였고, 2장 3절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이제 2장 4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날에 주님의 판결로 인해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즉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당신의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면 온 세상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는 희망에 찬 예언이 제시된다.
여기서 평화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말미암아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원죄와 완고한 불신앙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하느님의 옥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 옥좌에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 원수되었던 하느님과 화해하여 그분에게서 내려오는 평화를 나누어 갖게 된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평화로 볼 수 있다.
전쟁의 무기를 모두 농기구로 바꾸어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는다는 예언이
바로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완전한 평화를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이것은 장차 메시야에 의하여 이루어질 평화시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으로 이 땅에 시작된 메시야의 통치를 나타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성취될 메시야의 통치로 인한 완전한 평화의 시대를 내다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와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는 같은 뜻의 대구 구조를 이루는 문장이다.
앞의 것은 민족(나라)들 사이의 분쟁 해결의 측면을 강조하고, 뒤의 것은 잘못을 어긴 자들, 각 개인을 바로 잡는 교정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재판관이 되시고'에 해당하는 '웨샤파트'(weshapat)나 '심판관이 되시리라'에 해당하는 '웨호키아흐'(wehokiah)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 행위를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이 구절에서 주님의 통치로 이루어지는 평화의 나라는 전쟁이 전혀 없는 완벽한 평화를 구가하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칼과 창은 전쟁때에 필요한 무기이지만, 보습과 낫은 전쟁이 없는 평화 시기에 필요한 농기구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참전한 자들이 평화로운 때에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하고, 또 농사일을 하다가도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전쟁터로 나가곤 하였다.
따라서 농기구를 잡은 손이 무기를 잡게 되고, 또 무기를 잡은 손이 농기구를 잡게 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미래의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미래의 평화 시대를 예언했을 것이다.
'보습'(plowshare)은 쟁기의 술바닥에 맞춰 끼우는 삽처럼 생긴 쇠조각을 말하며, 씨를 뿌리기 위하여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그리고 '낫'(pruninghook)는 곡식을 추수할 때 이삭을 자르는 도구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전쟁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칼과 창을 파종과 추수때 사용하는 농기구로 만들 것임을 지적하여, 더 이상 살상무기가 필요없는 그야말로 완전한 평화 시대가 장차 도래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 문장 바로 앞에 나오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와 마찬가지로 본문은 절대적 부정의 의미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부정어 '로'(lo)가 이끄는 문장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같은 뜻의 대구를 이루는 강한 부정문을 반복 사용하여 두 번 다시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민족들 사이의 전쟁이 그칠 것이며 완전한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 예언은 그리스도 재림의 때가 가까워질수록,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전쟁이 자주 발발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예언(마태24,7)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모든 분쟁과 싸움, 다툼이 종식되는 완전한 평화, 곧 그리스도 재림 후에 이루어질 평화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대림 제1주일]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는 봄날의 햇살을 기다립니다.
한여름 숨 막히는 더위에는 가을의 선선한 바람을 기다립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기다림을 경험합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으로 이날을 시작합니다.
이 기다림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제1독서는 메시아 임금에 대한 기다림을 예언합니다.
그날에 하느님의 심판이 메시아 임금에게 전해질 것인데, 많은 백성 사이에서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으로 모두 모일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분의 길”,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라는 표현은, 신앙인이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덕목으로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을 제시합니다.
한편 제2독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구원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잠에서 깨어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삶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닥칠 것이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 들에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 맷돌질을 하던 두 여자의 이야기처럼 당신의 재림도 갑작스럽게 닥칠 것이니 늘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 안에서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을 재확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삶과 실천으로 늘 깨어 준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만남을 기다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복음(마태24,36-51)
36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 인간의 지혜, 의지, 노력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그날과 그 시간’이다. 아버지의 뜻을 아시며 통찰하시는 성령님만이 아신다.(1코린2,10)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 일상의 인간들의 삶이다.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나라, 뜻에 정신이 팔려 살았다는 것이다.
곧 뱀의 유혹에 팔려 하느님 처럼의 자리에 앉은 교만으로~, 성경은 그것을 어둠의 헛되고 헛된 삶, 죽음, 죄악이라 한다.
(갈라3,22) 22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 들에서 농사지어 맷돌질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을 할 때, 곧 구원의 양식을 구하는 신앙을 살 때 선과 악, 그 두 법으로, 곧 옛 계약을 행하며 ‘의롭다’하면 땅속에 놔두시고, 선과 악을 하나로, 곧 선이 악을 품고 죽어 용서, 생명을 주시는 ‘피의 새 계약’을 믿어 ‘의롭다’하면 ‘하늘로 데려 가신다’는 말씀이다. (로마3,20-25 10,1-4참조)
(히브10,9-10) 9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새 계약)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옛 계약)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새 계약)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 성령께서 증언(證言)하신다.(로마8,1-5 히브10,15-18참조)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것처럼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오시는 주님을 인간의 지혜, 능력으로 어떻게 준비하고, 무슨 수로 깨어있겠는가?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뜻, 생각을 통찰하시는 성령께 의탁하면 된다.
곧 피조물인 인간들이 뱀의 유혹으로(거짓, 헛된 가르침) 자신들의 주인이신 창조주의 자리에 앉아 하느님처럼 되어(창세3,5) ‘자신이 주인 노릇했던 그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영원한 보호자로 오신 성령께 내어 드리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시편121,3) 3 그분께서는 네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지키시는 그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신다.
☨ 영원한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의 마음과 삶에 충만 허소서. 아버지의 나라(진리)가, 아버지의 뜻(더 큰일)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깨어있음은 사랑을 삶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늑대가 양 무리의 어린양을 자신의 저녁식사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무리에 끼어 있으면 그 양을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양 인척 흉내 내며 늑대 무리에 잠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 지난 해 내 욕하고 다녔지?”
어린양이 대답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때 전 태어나지도 않았는걸요.”
그러자 늑대가 말합니다. “그러면 네 형이었나 보지.”
“전 형이 없는데요?”
“그러면 네 가족 중에 누구였을 거야.”
“저희 가족은 남의 험담을 하지 않아요.”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 어린 양인 자신이 무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늑대는 양에게 이렇게 말하고 잡아먹었습니다. “어, 상관없어. 이젠 저녁시간 다 됐거든.”
우리 안에 우리를 깨어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자꾸 말을 시키면 나는 정신없이 그것과 대화하다가 무리를 이탈하고 맙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체로키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그는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싸움이어서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도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인데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분개 자기연민 죄의식 열등감 거짓 허영 잘난 체하고 자신의 거짓자아를 나타낸단다.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이놈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선의 고요함 겸손함 동정심 관대함 진실 연민 신뢰를 나타낸단다. 이 같은 싸움이 네 안에서도 일어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도 일어난단다.”
손자는 잠시 동안 그 말을 생각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 노인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우리 안에는 항상 두 목소리가 있습니다. 한 목소리는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라는 것이고, 한 목소리는 이웃을 죽여 나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한 목소리는 나의 생존을 위해 이웃을 이용하라는 것이고, 다른 목소리는 이웃이 나를 이용해 이득을 보게 하라는 목소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한 목소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목소리는 자기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라는 목소리와 대화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목소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결국 그 목소리를 내는 것에게 영원히 잡아먹힙니다. 그 상태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늘 깨어 있지 못한 것의 결과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의 첫 날입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나타나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알려주러 오신 목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고도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1924년 파리올림픽 육상 400m에 출전한 에릭 리델은 예선에서 최고의 기록으로 수립, 금메달 획득이 유력했습니다. 그는 예선 때 출발선에서 흑인 선수와 악수를 나누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습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망의 결승전이 주일에 열리기로 결정됐습니다. 그러자 리델은 주저 없이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몇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과 인간 평등의 정신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원칙으로 삼고 살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엔 예수님께서 오심이 곧 심판이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마치 노아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방주를 만들었는데 다른 이들은 그 목소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배를 짓지 못한 이들은 심판 때 모두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해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살아온 사람은 마지막 때에 그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내려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태어납니다. 매 순간이 작은 심판인 것입니다. 내가 어느 목소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지옥의 백성이 되기도 합니다.
깨어있음이란 원칙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 원칙이란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원칙을 깨고 누군가 미워지는데도 용서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배를 만들지 못해 결국 물속에 잠기고 맙니다. 노아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배를 만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인 사랑을 지켜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될 방주를 만들어야합니다. 사랑의 계명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사는 사람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2025년 11월 30일 일요일
[대림 제1주일]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노아 때처럼 갑자기 올 것이니 “깨어 있어라.”(마태 24,42),
“준비하고 있어라.”(24,44)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깨어, 무엇을 준비하라는 말씀일까요?
절의 처마 밑을 보면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는 ‘풍경’이 있습니다.
이 풍경은 물고기 모양인데, 물고기가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곧 물고기는 잠들지 않고 늘 깨어 수행의 길로 나아가는 구도자의 자세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참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로써 이끄시는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을, 그 간절한 기다림과 평화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모두에게 품위 있게 살아가자며 흥청대는 술잔치와 방탕, 다툼과 시기와 같은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로마 13,12), 곧 “주 예수 그리스도”(13,14)를 입으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지상의 삶을 살면서도 한 발짝 물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 그분의 눈길과 행동 방식을 익혀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날마다 성경 읽기를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김동희 모세 신부)
깨어 있으라.
(마태복음24장36~44절)
마태복음24장을 통하여 우리는 계속 마지막 때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마지막”이라는 말이 단순히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먼저 마지막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마치 학교의 졸업이 끝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작이요 출발입니다.
②또한 마지막은 “목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목표가 성취되는 결과로서 마지막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헬라어의 “테로스”라는 말은 “목적”이라는 의미로도 쓰이고, “마지막”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결국 목적과 마지막은 같은 개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시작이면서, 또한 역사와 우주에 대한 주님의 계획과 목적이 완성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이 힘들고 어렵게 살도록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교제(交際)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 때문에 하느님과 분리되었고, 그 결과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게 되었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삶의 어려움을 느끼다가 죽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 때 의도(意圖)하셨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은 일차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주님 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교제하고, 주님 안에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 땅에 살면서 고난과 아픔과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고, 급기야는 죽음을 맛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창조 질서의 완전한 회복은 역사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완성됩니다.
그 때는 우리에게 더 이상 아픔이나 슬픔이나 괴로움이나 죽음이 없을 것이고, 온 우주에 더 이상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는 이사야 11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놀며, 어린이가 독사(毒蛇)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역사를 보는 시각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하느님께서 정하신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으로 믿고, 하느님의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나선(螺線)과 같다고 했습니다. 나선은 반복되는 것 같지만 어느 정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과 같이 보이지만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24장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재림이 오직 하느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어서, 누구도 그 시기를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때, 인자(人子)가 임하실 것이 때문에, 항상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고하십니다.
1. 주님의 재림의 날과 때는 알 수 없습니다(36절)
36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그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이처럼 재림의 정확한 시기가 비밀로 감추어진 까닭은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항상 깨어 경성하게 하기 위함이며, 주님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 날과 그 때”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교훈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1데살5:2-3) 2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묵시3:2-3) 2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2. 갑자기 임하신다(37~39절)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노아의 때를 말씀하시며, 마지막 때에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마지막 때에도 사람들은 땅의 일에만 정신을 빼앗기다가, 갑작스럽게 임할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해 모두 멸망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경고는 우리가 반드시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경고를 소홀히 여기면 우리도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어떠했으며 또 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만 전념하며,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요즈음도 당시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최대의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심판 날이 순식간에 임할 때 다 멸망하여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게 땅의 것을 위해 일하되, 땅의 것만 바라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먹고 마시는 것 자체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답게 하늘의 것 신령한 것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노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는 하느님께서 심판이 언제 시작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데도 깨어 있어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을 최선을 다하면서,하느님의 심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노아처럼 살아야 합니다.
게으르고 나태하지 않으며, 육체의 욕구가 이끄는 대로 살지 말고, 모든 일에 절제하면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일-본질적인 일에 최선을 다하며, 주님의 재림과 그분의 평가에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노아 같이 삶으로 불의 심판에서, 구원의 은혜(恩惠)를 입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깨어 있으라(40~42절)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있을 최종적인 분리에 대하여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농부가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듯, 어부가 그물에 있는 고기를 좋은 고기와 쓸모없는 고기로 분리하듯 함으로서 두 사람의 운명이 영원히 나누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과 그 때를 알아내어서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다만 매일의 삶을 믿음 가운데서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인식하고 그것을 희망하는 삶을 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면서 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재림을 희망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35절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300번 이상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신약성경은 요한 2서와 3서라는 두 개의 짧은 서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경에서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얼마나 확실한 일인지는 신약성경의 마지막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에서 주님은 모든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렇다, 내가 곧 간다.”(묵시22,20)고 말씀하시고, 사도 요한은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라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인식하면서 살아야 하고, 또한 얼마나 희망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를 다니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다시 오심을 실감하며 사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설령 이론적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간절히 희망하며 사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할 것은 주님의 재림 신앙이 없으면,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을 믿고 얼마나 희망하느냐는 문제는 우리의 신앙의 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척도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대는 얼마나 악하며 얼마나 살기가 힘듭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곧 재림하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매일매일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뼈저리게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이 주님의 재림을 희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 때는 모든 악이 제거되고, 우리의 한계가 극복되며, 진정한 삶과 행복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사도 요한과 같이 늘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4. 깨어 준비하라(43~44절)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어느 날, 어느 때, 어느 시각에 오실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특정한 때에 초점을 맞추어 그때만 어떻게 모면하려는 태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하느님의 자녀 다워야 하고, 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깨어서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내가 역사의 종말을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내가 내 생애의 마지막을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면 안 됩니다. 내 인생이 이 땅에서 영원할 것처럼 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한시적 인생이며, 그것을 항상 인식하고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 의식입니다.
종말을 의식하려면 항상 성령(聖靈)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종말(終末)은 가상의 스토리가 아닙니다. 개인의 종말이 실제로 다가오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언제나 실현 가능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의 대 상륙작전이 있었습니다.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면서도 끝까지 그 날짜와 시각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습니다. 그 공격 개시일을 D-DAY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디 데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聖經)은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예고해 줍니다. 종말을 인식하고 사는 것은 현재의 삶에 불편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익한 점이 더 많습니다. 종말을 인식할 때 현재의 삶이 경건해집니다.
살인강도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엄숙해집니다.
예수님 우편에서 사형 당하던 강도는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평생 고약한 짓만 하던 사람도 죽음이 다가오면, 자못 경건해지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이 잘못 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심판과 응징(膺懲)을 알게 함으로써 바른 생활로 돌아오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이 고달픈 사람들에게는 곧 다가올 하느님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종말 의식을 갖는 것은 성도의 필수 조건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느님은 심판의 날을 정하시고, 철저히 감추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려고 시도했고, 제자들도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아무도 그날과 때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심판의 날을 감추신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결코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에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미래는 불투명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계속해서 그리스도(왕)께 순종하지 않으면 마지막 날 후회와 공포로 통곡하면서 맞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순종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2) 예수님은 아무런 예고 없이 예측하지 못한 때에 홀연히 임하실 것입니다.
노아의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상의 현장에 심판의 주로 강림하실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노아를 통한 하느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반복되는 일상과 변함없는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심판의 날이 도래하여 모두 멸망할 때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도 평범한 우리 일상에 갑자기 찾아오셔서 모든 것을 결산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불신자를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불신자가 재림을 보고 나서 믿을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내 삶은 부끄러움 없이 예수님을 맞을 만큼 잘 정돈되고, 준비되어 있습니까?
3) 심판 날에 판결 기준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있을 것입니다.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택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은 때에 갑자기 오십니다. 그 시기를 가리키는 특별한 징조가 없습니다. 다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을 모으고 상을 주십니다. 믿는 나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4) 항상 인자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도둑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주님도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실 것입니다. 따라서 때를 알려고 하기보다 날마다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가 마치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인 것처럼 여기며 거룩하고 치열하게 살아갑시다.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면서 예비하고 있습니까?
(1데살5,6-8) 6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7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 8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