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26일 화요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잔(桮)속을 깨끗이 (마태23,23-26)
제1독서<우리는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로 결심하였습니다.>(1테살2,1-8)
1 형제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2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전에 필리피에서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우리 하느님 안에서 용기를 얻어 격렬히 투쟁하면서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3 우리의 설교는 그릇된 생각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속임수로 한 것도 아닙니다.
4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합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구실을 붙여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증인이십니다.
6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에게서도 찾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찾지 않았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위엄 있게 처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화답송>시편139,1-3.4-6(◎1) ◎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
○ 제 말이 혀끝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당신은 이미 다 아시나이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저를 감싸 주시고,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으시나이다. 너무나 신비한 당신의 예지, 저에게는 너무 높아 닿을 길 없나이다. ◎
복음<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마태23,23-26)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제1독서(2테살 2,1~3ㄱ.14~17)
"누가 예언이나 설교를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2)
테살로니카 2서 2장 2절과 3절ㄱ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성도들에게 주님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는 헛소문에 속아 넘어가지 말 것을 당부한다. 당시 테살로니카 성도들은 주님의 날이 임박했다는 소문으로 인해 큰 혼란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혼란을 초래한 근원을 크게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세 가지를 모두 부정어 '메테(mete; neither ~ nor)로 연결하고 있다.
또한 역시 세 번이나 쓰인 전치사 '디아'(dia; by)는 '~을 통하여'라는 의미로서 일어난 문제의 근원지를 밝혀준다.
즉 사도 바오로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예언을 통해서든지, 설교를 통해서든지, 편지를 통해서든지 결코 두려워하거나 결코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잘 전달한다. 이것은 이런 것들로 인해 테살로니카 교인들이 큰 혼란에 빠졌음을 반증한다.
여기에서 '예언'으로 번역된 원어는 '프뉴마토스'(pneumatos)로 나와있다. 이 단어의 원형 '프뉴마'(pneuma)는 성령이든, 악령이든, 인간의 지,정,의와 구별되는 독립적인 영적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요한1,33; 사도23,8; 2코린11,4).
이것은 본문에서 '예언'으로 번역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이 '프뉴마'는 다가올 일을 예언하는 영으로 묘사되었다. '예언'가운데는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영으로 말미암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1요한4,1~3).
테살로니카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영'에 근거하여 '주님의 날'에 대하여 운운했을 것이다.
또 어떤 자들은 자신이 사도 바오로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하는 말에 근거하여 또는 교인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에 근거하여 '주님의 날'에 대해 임의적인 말을 퍼뜨렸을 것이다.
'설교'로 번역된 '로구'(logu)의 원형은 '로고스'로서 말(word), 보고(report), 설교(homily, preaching)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자들은 좀 더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는 편지(letter)를 근거로 하여 그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
본절에서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로 번역된 '에피플로레스 호스 디 헤몬' (epiploles hos di hemon)은 '마치 우리를 통해 받은 듯한 편지' (a letter as if from us)라는 뜻이다.
이 말은 ① 그들이 사도 바오로에게서 받은 편지라는 것인지, ② 아니면 누가 썼는지 모르는 편지를 마치 사도 바오로에게서 받은 편지로 착각한 것인지, ③ 아니면 사도 바오로의 이름을 도용한 자들이 사도 바오로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라는 것인지 분명치 않은 표현이다.
만일에 ①의 추정이 맞다면, 그들은 아마도 테살로니카 1서 5장1~11절의 사도 바오로의
진의를 오해하여 주님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②와 ③의 추정도 결코 틀리지 않는다.
이를 따르면, 테살로니카 교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편지(테살로니카 1서는 아님)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면밀히 확인해 보지도 않고, 사도 바오로가 보낸 것으로 잘못 알았을 것이다.
특히 ③의 경우는, 사도 바오로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자들이 사도 바오로가 모르는 사이에 사도 바오로의 이름을 가장하여 테살로니카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고, 교인들은 그들의 의도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의미가 된다.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테살로니카 교인들로 하여금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핵심 내용이다. 여기서 '왔다'로 번역된 '에네스테켄'(enesteken)은 현재 존재해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에니스테미'(enistemi)의 완료형이다. 말하자면, '임박해 있다'(is at hand)가 아니고, '이미 와 있다'(has already come)라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 38절과 코린토 전서 3장 22절에서 '에니스테미'(enistemi)의 완료형이 현재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로 분명히 하였다. 거기서 '에니스테미'의 완료 부사 '에네스토타'(enestota)는 '장래 일'(things to come)이라는 의미를 지닌 '멜로타'(mellota)와 대조적으로 '현재 일'(things present)이라는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테살로니카 교인들이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통해 주님 재림의 날, 심판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고 오해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이 받고 있는 박해(핍박)와 혼난이 너무 심해서 최후 종말의 산고(the eschatoligical birth pangs)가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이 세상에 임하시는 주님의 날이 이미 도래하였다고 믿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이미 이르렀으나, 너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고 말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이야 어떻든, 그들 중 적지 않은 자들이 주님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고 믿어 요동하며 불안해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노오스'(noos)의 원형 '누스'(nous)는 마음 중에서도 지각하고 이해하는 기능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즉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 정신을 의미한다.
또한 '흔들리거나'로 번역된 '살류테나이'(saleuthenai)의 원형 '살류오'(saleuo)는 심하게 흔들어 대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며, 본문에서는 수동태로 사용되었다.
'쉽사리'로 번역된 '타케오스'(tacheos)는 '속히', '빨리', '경솔하게'라는 의미를 지닌 부사이다.
따라서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다'라는 원어적 표현은 밖에서 일어나거나 유포되고 있는 어떠한 사실을 여과없이 쉽게 받아들여, 이성(理性)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당시 테살로니카 교인들의 모습을 매우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마태오 복음에는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행복 선언(산상 설교의 시작, 마태 5,3-12 참조)의 말씀과 “불행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말씀(마태 23,13-37 참조)이 나옵니다.
복음 안에서 이 두 선언이 서로 교차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맞서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길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일곱 가지 불행한 삶에 관한 말씀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경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의 위선의 가면을 벗겨 내십니다. 위선자는 한마디로 연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위선자의 행동에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자 하는 목적과 지향이 담겨 있습니다.
위선의 깊은 뿌리에는 자기 애와 자기 만족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주의는 정확히 참 사랑과 반대됩니다.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땅히 옳은 일, 명시적인 바른 규정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 경우 모든 사람이 그것은 잘못된 일이고 그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다른 방식의 악행이 있는데, 이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훨씬 더 나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에 해당하는 일들입니다.
이를테면 법의 준수라는 가면을 쓰고 저지르는 숨은 악행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겉으로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아 스스로 만족해하지만, 실제로는 작고 약한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양심을 해칩니다.
‘십일조 규정은 지키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더 중요한 하느님의 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오늘 하루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특히 의로움과 신의 사이에 있는 중심 말씀인 ‘자비(慈悲)’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마태 23,23-26)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 박하, 시라, 소회 향은 제사 때 사용되는 물품으로~ 제사의 의미 곧 죄인들의 대속으로 죽으시는 그 하늘(예수님)의 죽음 그 의로움 그 하느님의 약속, 그 신의는 모르면서~ 자신들의 뜻을 위한 자기 의로움의 그 열심한 종교 행위를 더 중요시하는 것을 나무라시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런 그들은 구원을 못 받는다고 사도는 말한다.
(로마10,2-3)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3,20.24)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그 제사로 죄인들이 거저 받는 의로움, 그것이 하느님의 신의이며 모든 계명과 말씀 속에 들어있는 사랑인 것,
그 구원의 사랑, 그 하나를 깨닫고 그 사랑에 감사의 영광을 드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십일조인 것이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 낙타는 부자를 뜻한다. 하느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받아 지킨 그 자기 의로움, 명예가 큰 사람(부자)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다.(마태19,24)
그 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 그 죽음을 헛되게 하는 큰 죄인인 것이다. 그 큰 죄는 가르치지 않으면서 사람의 규정(계명)과 교리에 의한 잘못(죄)만을 가르친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눈 먼, 큰 위선의 큰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 열심한 종교 행위와 선행, 그 보이는 자신의 의로움은 드러내지만 자신의 더러운 속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신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그 마음을 사람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척’하는 것이다. 믿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척’ 그러나 그것은 자신도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야고1,22)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 십자가의 용서, 그 하느님의 계약, 그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받아 들여 믿는 것, 곧 마음에 간직(킵-실행) 하는 것. 그것이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실행, 말씀 마음에 없으니 죄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 행위에 열심인 것이다.
앞에서 묵상했듯이 그 자신의 행위로는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사람의 탐욕, 그 욕심(죄)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그들의 죗값, 대속의 제물로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속죄 제물로 보내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을 진리로 깨닫고 믿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참조~(히브9,14)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히브10,22)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 우리의 더러운 마음이 그리스도의 죽음(피)으로 깨끗해 짐을 믿기 위한 것이 또한 세례인 것이다.
(1베드3,21)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아멘.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복음(마태23,23~26)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3)
마태오 복음 23장 23절과 24절은 네번째 저주 선언이다.
이것은 세번째 저주 선언(마태23,16-22)과 더불어 가치 전도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면서 특히 사소한 것은 취하면서도 참으로 취해야 할 율법의 근본 정신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영적인 사악함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십일조의 대상으로 삼은 것들 중에서 '박하'로 번역된 '헤뒤오스몬'(hedyosmon; mint)은 '향기롭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며, 조그맣고 향내나는 일종의 향료 식물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이 식물의 가루나 즙을 집이나 회당의 바닥에 뿌려 향기를 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라'로 번역된 '아네톤'(anethon; anise, dill)은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양념의 향료로 사용되었다.
또한 '소회향'으로 번역된 '퀴미논'(kyminon; cummin)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는 향기가 짙은 식물로서 양념이나 약용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십일조로 낸 것으로 나오는 이같은 식물들은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 율법(신명14,22.23)의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것들이다.
즉 율법은 밭에서 나는 소출 중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분의 일을 규정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런 기본적인 것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크게 신경쓰지도 않는 사소한 부분에까지 십분의 일을 엄격하게 떼어 하느님께 드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종교적 열심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는 열심을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간과해버리는 그들의 영적 무지와 남에게 보이는 데만 치중하는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들'에 해당하는 '바뤼테라'(barytera; more important matters)는 '무게가 무거운'을 의미하는 형용사 '바뤼스'(barys)의 비교급 목적격 복수이다.
여기에 나오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준수해야 할 모든 율법 조항과 비교해서도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서, 개개의 모든 율법 조항들이 추구하고 담고 있어야 할 근본 정신인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은 정말 지키고 간직해야 할 율법의 근본 정신은 버리고, 그것을 포장하는 겉껍데기만을 열심히 보존한 사람들이었다.
먼저, '의로움'으로 번역된 '크리신'(krisin; justice)의 원형 '크리시스'(krisis)는 법정적 용어로서 '나눔', '분리', '논쟁'등의 의미와 더불어 '판결', '심판', '의', '공의'등의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문맥을 고려할 때, 여기서는 '심판'(judgment)보다는 '공의'(justice)라는 의미가 더 적합하다. 그리고 '자비'로 번역된 '엘레오스'(eleos; mercy)는 '불쌍한 자와 고통받는 자를 보고서 그들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호의'를 의미하는 명사이다.
'엘레오스'(eleos)는 구약 성경 칠십인역(LXX)에서 히브리어 '헤쎄드'(hesed)의 역어로서 사용되었는데, 계약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실한 사랑의 행동으로서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베푸는 은혜와 자비를 포함한다.
여기서는 죄에 빠져서 하느님의 길을 떠나버린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하심도 담겨 있다.
끝으로 '신의'로 번역된 '피스틴'(pistin; faith)의 원형 '피스티스'(pistis)는 '믿음', '신앙'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명사로서, 특히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확신이나 믿음을 가리킨다.
위의 세 가지 덕목은 인간의 사회 생활과 신앙 생활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미카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밝히신 적이 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6,8)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경건한 신앙심 없이 형식적이고 위선적으로 바치는 종교적, 제의적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정의와 공의, 자비,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폐기론자가 아니셨다(마태5,17).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자는 것입니다.'(로마3,31) 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외적 준수 뿐만 아니라 그 정신의 이행까지도 강조하셨다. 여기서 '~해야만 했다'로 번역된 '에데이'(edei)는 '당연히~해야 한다', '마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데이'(dei)의 미완료 과거로서, 위와 같은 것들을 '당연히'(ought to) 그리고 '지속적으로'(continually)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2025년 08월 26일 화요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공동체에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하였나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마치 자식을 품에 안은 부모처럼 신자들을 온화하게 대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은 그 내용도 중요하였겠지만, 전하는 방식도 중요하였을 것입니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서간을 쓸 경우와 이방계와 유다계가 섞여 있는 경우, 같은 복음 내용이더라도 다양하고 저마다 적합한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는 내용과 형식에서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의 복음 선포 행위를 도구로 삼아 풍성한 열매를 맺어 주셨습니다.
이 점을 놓친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오류인 위선과 탐욕과 방종이라는 ‘독버섯’이 교회 안에 피어오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교회 활동을 할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활동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봅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마르 2,22; 루카 5,38)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이상적이어도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변변하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크고 작은 교회 활동 가운데 공동체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우리가 선택한 방식이 얼마만큼 하느님 뜻을 담아내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봅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먼저 잔(盃) 속을 깨끗이 하여라.
오늘은 먼저~
(말라3,10) 10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
= 하느님의 집에 채울 양식이 뭘까? 인간의 재물?, 의? 하늘 아래 허무요 헛되다 하신 것을, 하느님께는 없음인 것을, 그것들을 무엇에 쓰시려고, 그리고 멸망하게 썩어 없어질 것이라는데...(요한6,27. 코헬1장 참조)
또 그런 것을 ‘구(求)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마태6,7.24) 바치라고 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하늘 아래 허무요 썩어 없어질, 헛된 것을 복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며 '의롭다'고 한 바리사이에게 불의(不義)하다 하셨다.(루가18,12-14) 그러면 십일조는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
*십일조- 십(十)의 하나(一)로, 십의 정신인 하나, 사랑이다.(숫자10은 하나(1)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알아보자~
복음(마태23,23-2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 모두 제사에 쓰이는 식물이다. 곧 자신의 뜻(의)을 위한 제사 예물, 십일조는 내면서, 더 중요한 하늘의 의로움과 자비, 신의에 대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한 것을 위선이라 하심이다.
*말씀을 600가지 넘는 법으로 만들어 십일조를 열심히 냈던 이들이다. 물론 기도 응답을 받을 속셈이었다. 위선이다. 모든 것의 실체는 그리스도 예수님 이시다.
(골로2,14.16-17)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죄)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16 그러므로 먹거나 마시는 일로, 또는 축제나 초하룻날이나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17 그런 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 열심한 종교행위, 모든 율법, 전례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얻는 하늘의 의, 생명, 그 진리를 가리킨다.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 우리의 죄로 죽으시고 의롭게 해 주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사랑’의 하느님께 감사, 찬미, 영광 드리는 것, 십일조다.
또한 그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께 감사, 찬미, 영광 드리는 것, 십일조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당신의 집, 창고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감사, 찬미, 영광만 받으신다.(이사43,7)
그러니 자신들의 뜻, 소원을 얻어내기 위해 인간들의 의, 재물 등, 여러 종교행위로 십일조를 봉헌하려 한다면 그것이 위선, 불의, 불법이다.
그러면 십일조 안 드려도 되나? 그렇다. 돈(錢)으로 드리는 십일조는 없다. 다만 앞서 확인 했듯이, 우리 죄인들이 하느님의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구원의 계약과 그 뜻에 순명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부터 새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그 생명에 대한 감사로 목숨과 같은 돈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이다.(헌금은 내 목숨 값이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 교회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인간들의 계명으로 지은 죄는 골라내면서, 하느님께 지은 죄, 곧 창조 이전 세우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받는 하늘의 의, 거룩을 믿지 못하게 한 죄,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신앙이 아닌 자신들의 영광, 만족을 위해 살게 하는 죄,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신앙이 아닌 자신들의 영광, 만족을 위해 살게 하는 죄, 그래서 인간의 뜻을 위해 계속 제사 드리며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게 하는 죄, 그 죄들을 말씀하신다.(필리3,18참조)
제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제물로 드려 ‘십자가에서 단 한 번에 다 이루어졌다.’ 하셨고, 그래서 제사와 예물은 더 이상 없다.(히브10,12.14.18참조) 감사와 기쁨의 축제(祝祭)만 있을 뿐이다.
미사(missa)는 제사가 아닌 감사로 영광을 드리는 기쁨의 잔치, 예배다.(요한4,23-24참조)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 겉은 제사와 윤리의 행위로 의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뜻을 위한 자기 만족을 위한 속셈에서 나온 것으로, 그것이 교만, 방종의 생각이라는 말씀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의 법으로 살았던, 그러나 그 법을 잘 지킨 자기 의(義)로는 구원에 이르도록 깨끗한 것이 아닌, 여전히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기 부인(否認)으로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하게, 새 것이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 그 새 계약을 받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겉과 속, 모두를 새롭게 새 것으로 새 창조 하신다.(2코린5,17)
늘 마음에 간직하여 지키자. ~
(히브10,19-22)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하늘)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하늘門)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속죄제물)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21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가 계십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새 계약의 말씀)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 그리스도의 피, 그 하느님의 죽음의 효과인 용서, 자유, 거룩은 영원하다. ‘어제도 오늘도, 또 앞으로도, 영원한’ 전지전능 이시기 때문이다.
(히브10,12-14)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당신)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 그 원수 안에 이기적인 삶을 살아온 ‘나’도 들어있다.
(로마5,10)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에페1,12)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아멘)
☨보호자 천주의 성령님!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