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21일 목요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하늘나라 혼인 예복 (마태22,1-14)
제1독서<저를 맞으러 제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을 주님께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판관11,29-39ㄱ)
29 주님의 영이 입타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길앗과 므나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길앗 미츠파로 건너갔다가, 길앗 미츠파를 떠나 암몬 자손들이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30 그때에 입타는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31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32 그러고 나서 입타는 암몬 자손들에게 건너가 그들과 싸웠다. 주님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으므로,
33 그는 아로에르에서 민닛 어귀까지 그들의 성읍 스무 개를, 그리고 아벨 크라밈까지 쳐부수었다. 암몬 자손들에게 그것은 대단히 큰 타격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굴복하였다.
34 입타가 미츠파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딸이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면서 그를 맞으러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입타에게 그 아이 말고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
35 자기 딸을 본 순간 입타는 제 옷을 찢으며 말하였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 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 내가 주님께 내 입으로 약속했는데,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단다.”
36 그러자 딸이 입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주님께 직접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원수인 암몬 자손들에게 복수해 주셨으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37 그러고 나서 딸은 아버지에게 청하였다. “이 한 가지만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두 달 동안 말미를 주십시오. 동무들과 함께 길을 떠나 산으로 가서 처녀로 죽는 이 몸을 두고 곡을 하렵니다.”
38 입타는 “가거라.” 하면서 딸을 두 달 동안 떠나보냈다. 딸은 동무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처녀로 죽는 자신을 두고 곡을 하였다.
39 두 달 뒤에 딸이 아버지에게 돌아오자, 아버지는 주님께 서원한 대로 딸을 바쳤다.
<화답송>시편40,5.7-8ㄱㄴ.8ㄷ-9.10(◎8ㄴ과 9ㄱ)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오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거짓된 자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 ◎
○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
복음<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22,1-14)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연중 제20주간 목요일(판관 11,29-39ㄱ)
주님의 영에 사로잡힌 판관 입타는 암몬 자손과의 한판 승부를 앞두고 서원을 한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때, 저를 맞으러 제 집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30절)
주님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셔서 암몬 자손들을 제압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데, 하나 밖에 없는 외동딸이 손 북을 들고 춤추며 그를 맞으러 나온다.
옷을 찢으며 비탄에 빠지는 입타~~그는 하느님 앞의 약속(서원)이라 지키고자 하고, 딸도 아버지의 서원을 존중한다.
사람을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던 고대 관습은 후대 예언자들의 비판을 받고 율법에서 금지된다.
그러나 우리는 입타의 서원의 정신만은 알아 들어야 한다.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모리야산에서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쳤던 대목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때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순명하는 태도와 정신을 본 것이지, 생명의 단절은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악 대신에 나무 위에 숫양을 마련해 주셨다.
봉헌할 때의 서약은 대죄가 없는 은총 지위에서, 타인의 강요가 아닌 자발적 원의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반드시 서약의 내용은 지켜져야 한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판관 입타에서 처럼, 생명의 단절을 가져 오는 무모한 서약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니, 하지 말아야 한다.
봉헌과 서약의 정신, 곧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리는 정신은 일상의 삶속에서 사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삶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결심과 서약은 구분해야 한다.
하느님 대전의 서약의 파기는 죄가 되지만, 자신이 자신 앞에 하는 결심의 파기는 죄가 되지 않는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다.~~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7참조)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매일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예수님의 비유의 중심 주제는 늘 하느님 나라이고, 이는 오늘 복음에서 처럼 잔치로 비유 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 속의 혼인 잔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저녁 식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언제나 문을 잠그지 않고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의 잔치는 기쁨과 무상성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잔치에서 이런 무상성의 특성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누가 잔치를 연다고 초대하면 벌써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무엇을 들고 가야 하나?’ ‘얼마쯤 넣어 가야 하나?’ 나아가 ‘꼭 가야 하나?’ 등의 별의별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요즘 세상에서 공짜는 실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공짜라고 해 놓고 실제로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입니다.
무상의 초대가 사라져 버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초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성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모두 불러오라는 비유 속 주인의 말은 속상할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이가 초대받아 풍부하게 나누고 먹을 수 있는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그 잔치는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복을 마련하는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하느님 나라의 삶의 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잔치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거기서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 욕심만 차리고 저만 위하여 사는 사람이 내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만 아는 이들 속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옷과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 옷, 곧 하느님 나라에 걸맞은 양식으로 살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 음식을 즐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비유
(마태 22,1-14)
1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 아들의 혼인 잔치란~ 일꾼, 사람들이 포도나무의 가지로 붙어 나무와 한몸이 되는, 곧 예수님의 대속 그 십자나무를 구원의 진리로 받아 짝을 이룬 그 한 몸이 되는 혼인잔치인 것이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 황소와 살진 짐승의 죽음, 곧 하느님의 구원의 계약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으로 완성된 구원의 잔치인 것이다.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 세상과 타 종교인들의 얘기가 아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세상과 짝한 모습인 것이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 하느님 나라는 *악한 사람 *선한 사람 모두가 가는 곳이다.
그러나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모두 사람(땅)의 옷을 입고 간다. 그러나 하늘의 잔치에 들어가려면 하늘의 주인께서 준비한 하늘 예복, 곧 하늘의 의로움인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 그 진리의 옷으로 갈아 입어야 들어갈 수 있다.
(묵시19,7-8)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다. 8 그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는 특권을 받았다.” 고운 아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입니다.
= 아마포 옷, 예수님의 죽음의 옷, 그분의 ‘수의’ 이다. 곧 예수님의 대속 그 십자가의 죽음을 구원의 진리로 입는 것(먹고, 입는 것) 그것이 성도의 의로운 행위, 행실이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이를 가는 것, 후해 해서도, 억울해서도, 분해서도 아니다. 씹을 것이 없어서, 곧 십자나무의 열매, 그 구원의 양식, 말씀(씨)이 없어서 이빨끼리 부딫히는 그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 성당(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 구원의 씨 곧 십자가의 복음이 구원의 진리로 마음 안에 있어야 받는 것이다.
(1베드1,23) 23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아멘.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22,1-14)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11~12)
마태오 복음 22장 11절은 한글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접속사 '데'(de; and; but)로 시작한다.
이것은 여기서 부터 또 다른 국면의 사건이 전개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말하자면, 지금부터 임금이 등장하여 임금 중심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임금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부터 잔치가 본격화 될 것을 보여 주는 것인데, 영적으로 천국 잔치의 본격적 시작 시점인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통치는 지금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리스도 재림 이후에 있을 본격적인 천국의 잔치에서 예복을 입은 자에게는 더 큰 기쁨을 누리는 날이 될 것이고,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게는 큰 슬픔의 날이 될 것이다.
여기서 '예복'으로 번역된 '엔뒤마 가무'(endyma gamu; wedding clothes)는 '결혼식 때 입는 옷'을 뜻한다.
본래 '엔뒤마'(endyma)는 '겉옷'이나 '외투'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옷 위에 덧입는 옷이다.
유다인들의 혼인 잔치에는 혼주가 나누어 주는 예복을 입어야만 했다.
이들에게도 분명히 임금이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창세45,22; 판관14,12).
하지만 한 사람이 이 예복을 입지 않은, 너무나 무례하며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임금의 잔치 석상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심판의 자리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심판의 날에 입어야 할 예복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입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갈라3,27), 자기 육(肉)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대신 성령의 능력을 얻어 입어서(갈라5,22~24) 의로운 행위를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묵시19,8).
한편,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을 향해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
'친구'로 번역된 '헤타이레'(hetaire; friend)는 '헤타이로스'(hetairos)의 호격이다.
'헤타이로스'(hetairos)는 다정한 느낌의 '동료', '동무'를 뜻하기도 하지만(마태11,16), 문책과 심판의 대상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다.
포도밭 임자가 품꾼 중에 원망하는 자들을 부를 때 이 단어를 사용했고(마태20,13),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배반하기 위해 오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부를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마태26,50).
따라서 여기 본문의 '친구'도 카리옷 사람 유다처럼 거짓으로 하느님의 나라의 공동체 안에 몸붙이고 있으면서도, 의(義)로움을 좇지 않고 악(惡)을 고집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면 무방하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로 번역된 '에피모테'(ephimothe; was speechless)의 원형 '피모오'(phimoo)는 '재갈로 입을 막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임금의 질문 앞에 마치 입에 망을 씌운 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임금이 예복을 준비하여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었으며, 결국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표현은 최후의 심판 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지엄하신 위엄과 그분의 책망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이 겪게 될 비참한 운명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025년 08월 21일 목요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도 어제와 같이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앞부분에서(마태 22,1-10 참조)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오지 않자, 임금은 고을을 불사른 다음 고을 어귀로 종들을 보내어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데려옵니다.
뒷부분은(22,11-13 참조) 사뭇 당혹스럽습니다.
임금의 말에 따라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데려왔지만, 그들 가운데 예복을 갖추지 않은 이가 있었기에 임금은 그를 끌고 가서 어둠 속에 던지게 합니다(22,13 참조).
이렇게 두 가지 이야기에 이어지는 14절은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라고 결론 내립니다.
비유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다교 전통은 하느님을 보통 ‘임금’으로 표현하였지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던 마태오 공동체에게 이 비유는 이해할 만하였습니다.
둘째,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고을을 파괴하는 장면은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정신적 충격으로 남습니다.
셋째, 임금은 종들을 보내 길거리에 있던 이들을 모두 초대합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까지 하느님 나라에 선인과 악인이 섞여 있음을,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죄인들까지 당신 나라의 기쁨으로 초대하심을 암시합니다.
넷째, 먼저 구원의 길로 초대되었으나 예수님을 믿지 않아 구원의 잔치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간 유다인들을 가리키는 내용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여정을 먼저 시작하였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초대에 귀 기울이지 않거나 합당한 예복을 갖추지 않는 듯한 모습을 우리 안에서도 발견하지 않나요?
(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긴 했는데
복음(마태22,1-14)
1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 왜 가려하지 않았을까? 지기와 상관없는 잔치라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사가 혼인잔치 아닌 제사로, 또 마지 못해 와서 동네잔치 구경하듯 하는 이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 이미 완성된 혼인잔치, 하느님 나라다. 그러나 아직 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오늘날까지 그 아직 인 신앙을 사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스스로 준비하는 신앙을 산다. 혼인잔치는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다 준비하신다. 하늘잔치는 주인의 부르심(말씀)을 듣고 주인이 준비하신 예복(禮服)으로 갈아입고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황소는 하느님을, 살진 짐승은 예수님을 뜻한다. 곧 혼인 잔치는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당신 외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 주시고 그 값으로 완성된 하늘나라 잔치라는 것이다.(에페1,4 히브4,3 참조)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당신의 죽음으로 완성하신 잔치를 믿지 못하니 스스로 준비를 하는 그 헛된 수고를 하려는 것이다.
(에페2,8-9)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이사46,4) 4 너희가 늙어 가도 나는 한결같다.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지고 간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안고 간다. 내가 지고 가고 내가 구해 낸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 어떻게 죽일 수가~ 스스로 혼인 잔치 준비를 하는, 곧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신들의 수고와 열심을 방해하는 이들이 잘못된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한16,2)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혼인 예복은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이미 준비하셨다. 그런데 준비된 그 예복으로 갈아입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입고 있던, 그 자기 의로움의 옷이 더 합당하다고(멋지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곧 자기 버림, 부인이 안 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것저것 스스로 준비하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 버림, 부인을 위한 신앙을 살아야 한다.
(창세2,7) 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자신이 흙도 아닌 흙의 먼지로 하느님의 숨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그 없음의 존재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라면,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예복을 얼른 갈아 입었을 것이다.
(이사64,5) 5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 자신에게서 나오는 인간의 선, 의로움이 개짐(더러운 똥 걸레)으로 지옥에 갈 죄인일 뿐임을 깨달은, 그 자기 부인이 된 사람이라면 하느님께서 예비 하신 예복을 감사로 얼른 갈아입었을 것이다.
(마태5,3)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마음(心靈)이 가난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마음이 부자로, 곧 자신의 욕심, 욕망을 위해 살았던 그 잘못으로 괴로웠던 사람이라면, 거저 주시는 예복을 볼 것도 없이 얼른 갈아입었을 것이다.
(마르12,30-31)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하느님의 계명을 살지 못했던, 곧 자신의 생각(뜻)을 위한, 자신만을 사랑했던 그 자신의 추악함, 그 본질을 본 사람 이라면 염치없이, 두 말할 것도 없이 얼른 갈아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문제는 하느님께서 그 혼인예복을 준비하신다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아입을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모르는, 곧 성경을 깨닫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전능하신 사랑, 자비를 알았다면 오늘 독서의 입타처럼 스스로 오바한 자신의 헛된 서약으로 사랑하는 딸이 한스러운, 헛된 죽음을 죽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태5,33-37참조)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예복을 보자~
(창세3,21)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 가죽 옷, 하느님께서 어린양을 죽이시고 남긴 가죽으로 만든 옷이다. 곧 죄인(아담)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의로움의 옷, 혼인 예복이다.
(묵시19,7-8)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다. 8 그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는 특권을 받았다.” 고운 아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입니다.
= 아마포 옷- 예수님의 수의다.(요한20,5~참조) 우리의 죄로 죽으신 그 예수님의 수의를 예복으로 입는 것이 성도들의 특권이며 의로운 행위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바룩5,2) 2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이사61,10)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 성당(聖堂)다니는 사람은 많으나 깨닫는 사람은 적다는 말씀이다. 자신의 뜻을 위해 열심인 신앙인은 많으나 하느님의 뜻을 위해 열심인 신앙인은 적다는 말씀이다. 육(肉)의 목숨을 위한 신앙인은 많으나 영(靈)의 구원을 위한 신앙인은 적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많으나 그리스도인은 적다는 말씀이다.
(로마13,14) 14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예비, 완성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