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18일 월요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마태19,16-22)
제1독서<이스라엘 자손들은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판관2,11-19)
11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2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
13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다.
14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어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 버리시고 약탈당하게 하셨다. 또한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
15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이 싸우러 나갈 때마다 주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심한 곤경에 빠졌다.
16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17 그런데도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빨리도 벗어났다. 그들은 조상들의 본을 따르지 않았다.
18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판관들을 세우실 때마다 그 판관과 함께 계시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억압하는 자들과 학대하는 자들 앞에서 터져 나오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19 그러나 판관이 죽으면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완악한 행실과 길을 버리지 않았다.
<화답송>시편106,34-35.36-37.39-40.43ㄱㄴ과 44(◎4ㄱ) ◎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 백성들은 주님이 없애라 하신 민족들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그 민족들과 어울리면서, 그 행실을 따라 배웠네. ◎
○ 그 우상들을 섬기니, 제 스스로 덫에 걸렸네. 자기네 아들딸을 마귀에게 바쳤네. ◎
○ 자기네 행실로 더러워지고. 자기네 행위로 불륜을 저질렀네. 주님은 당신 백성을 향하여 분노를 태우시고. 당신 소유를 역겨워하셨네. ◎
○ 그분은 거듭거듭 구출해 주셨건만, 자기네 뜻만 좇아 그분을 거슬렀네. 그래도 그분은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고, 그들의 곤경을 굽어보셨네. ◎
복음<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마태19,16-22)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제1독서 (판관2,11-19)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 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16-17)
본문은 자신들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판관을 일으키셨다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데만 몰두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일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판관'으로 번역된 '쇼페팀'(shopetim; judges)는 '재판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트'(shapat)의 분사 복수형으로서 명사적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따라서 '판관'은 문자적으로는 '재판하는 자', '재판관'이라는 뜻이며, 개신교에서는 '사사'(士師)라는 단어를 쓴다.
당시 '판관'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쟁을 재판하고 쟁론을 그치게 하는 것으로만 그 성격이 제한되지 않고, 군사 지휘관의 지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적대자들의 공격에서 구원해 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원문 성경은 복수형을 사용해서 판관이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나타내 주고,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때와 장소에 적절한 판관들을 세우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하였다' (16)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 주시도록 하셨다'에 해당하는 '와요쉬움'(wayoshium; which delivered them; who saved them)은 계속적 '와우'(wau)와 '구원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야샤'(yasha)의 사역능동형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형과 남성 3인칭 복수 목적격 접미어가 결합한 형태이다.
직역하면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들(판관들)로 하여금 그들(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다' 이다.
이처럼 겉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수들에게서 구원한 사람들은 판관들이지만 그 뒤에서 그 일을 계획하고 성취하도록 만드신 참된 지도자는 하느님이심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것이 당신이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행하신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구원자를 보내신, 사랑이 풍성하신 하느님이심이 계시되고 있다(판관2,15.18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받거나 고통을 받는 것을 결코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억누르지도 슬프게 하지도 않으시네" (애가3,33)라는 말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 고난을 사용해서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키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를 그 죄악 가운데서 돌이키기 위한 하느님 자비심의 발로인 것이다.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 뿐더러'(17)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위기에서 구원한 판관들의 말까지도 듣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이없어 하는 저자의 심정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판관기 2장 16절에 나오는 데로 하느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워서 그들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이처럼 자신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힘을 쓴 판관들에게조차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판관 시대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적대자들의 압제에서 구원해 준 인도자의 말도 듣지 않는 부도덕하고 몰염치한 존재들이었다.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불륜을 저지르고'에 해당하는 '자누'(zanu; they went a whoring; prostituted themselves)는 '음행하다', '간통하다', '불륜을 저지르다'는 뜻을 가진 동사 '자나'(zana)의 완료 3인칭 복수형으로서, '그들이 간통하였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족속들의 신을 숭배하는 것을 영적 간음으로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 계약을 맺은 참된 주인이신 주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은 마치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 것과 같은 부도덕하고 있을 수 없는 행위로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경배하였다'에 해당하는 '와이셋타하우우 라헴'(waishethahauu lahem; and worshiped them; and bowed themselves to them)에서 '와이셋타하우우'(waishethahauu)는 '절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샤하'(shaha)의 재귀형 미완료 3인칭 복수형에 계속적 '와우'(wau)가 접두된 형태로서 '그들이 스스로 절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판관기 2장 12절의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와 동일한 문구로서 이방 신들에게 절한 것이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발적인 뜻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여 준다.
가나안 땅은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지며 목초지가 많고 농사가 잘 되는 땅이었는데, 가나안에서 거주하던 이들은 그 땅에서 풍요를 누리는 원인이 햇빛과 바람과 비를 주관하는 바알신과 풍요를 주관하는 아스다롯 여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그러한 사상을 흡수했으며, 이제 더 이상 주 하느님은 가나안 땅에서 그들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신이 못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이방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탐욕을 품었으며, 가나안의 발전된 문화를 동경하며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받아들이는 우상 숭배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마음의 온전한 정(情)과 사랑을 드리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 즉 사람과 세상의 헛된 우상들인 돈, 물질, 권력, 명성, 쾌락, 지식 그 자체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겨 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하고 회심할 일이다.
08월.18일 월요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오늘의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비결을 묻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옵니다.
오늘 복음은 가진 것이 많지만 자기 생명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이를 해결하고 싶은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다가가 무엇을 청합니까?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청합니다. 올바른 이스라엘 사람은, 다시 말하여 올바른 신앙인은 필요한 온갖 것을 하느님께 선물로 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땅”(시편 135[134],12)과 ‘율법’(119[118],111 참조), ‘축복’과 ‘약속’(히브 6, 14-15 참조), 그리고 ‘하느님 나라’(마태 25,34 참조)를 받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와 우리는 하느님께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착한 행실의 대가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가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은 이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우리 모두’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복음사가가 고른 말입니다.
이상적인 신자는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복음에서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현존과 그분의 말씀이 효과를 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보장하여 주는 재물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부(富)를 선택하는 대신 슬퍼하며 떠나간 사람, 그는 앞으로 더 슬프고 힘들 것입니다.
진정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합니까?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마태19,16-22)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 선한일, 선이신 하느님의 일을 믿는 것, 곧 선(하늘)이 악(세상의 죄)을 대속하여 생명을 주는 일이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속죄 제물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악,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선이신 하느님의 뜻인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고 하신 것이다.
그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선한 일인 것이다.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어떤 행위를 묻고 있다. 질문 부터가 틀린 것이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 단 한 분이신 선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 모든 계명은 십자가의 대속 그 이타의 사랑, 그 사랑의 계명 하나 인 것이다.(마르12,28~참조)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율법, 십계명 전체를 대속의 사랑, 그 하나로 깨닫고 믿느냐? 아니면 도덕과 윤리의 법으로 지키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오늘 이 사람은 윤리의 법으로 지켰다. 그리고 그 자기 의로움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의 계명으로 지켰다는 것은 하늘의 계명, 곧 대속, 그 구원의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티토1,14) 14 유다(세상, 사람)인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그래서~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 자신이 열심히 지킨 그 자기 의로움(가치, 재물, 재산)을 버리고 곧 자기 의로움은 구원의 가치, 힘,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인정하고, 버리고 따르면 하늘의 보물, 하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세상의 재물, 그 세상의 명예, 의로움, 자기 가치가 구원의 힘, 능력, 가치 없음을 인정하는 그 버림, 否認을 못한다. 그것인 인간의 교만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목숨은 有限의 없음으로 끝날 뿐, 그 흙인 질 그릇에 예수님의 길,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의 길을 구원의 진리로 담으면, 믿으면~ 그것이 곧 하늘의 생명을 담는 것으로 있음(생명)의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멘.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9,16~22)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1)
마태오 복음의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10장 21절과 루카 복음 18장 22절에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대신에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말씀을 다 하셨는데, 복음서 저자들이 각기 그 가운데 하나씩 선별하여 기록했다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라는 말씀을 먼저 하시고, 이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부족한'과 '완전한'은 대조되는 개념이 된다.
즉 '완전한'이란 부족함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에 해당하는 '텔레이오스'(teleios; perfect)는 일차적으로는 결여된 것이 전혀 없는 완벽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하지만 인간이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보면, '텔레이오스'(teleios)는 '성숙한' 혹은 '목표에 도달할 만한 수준의'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히브5,14).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지고(至高)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이 구절을 통해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19장 17절에서 '계명들을 지켜라'는 우회적인 답변을 통해 그가 계명을 전부 지키지도 못함을 교훈하려 하셨던 것처럼, 마태오 복음 19장 21절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으로서 구원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더욱 더 명백하게 하신 것이다.
구원은 어떤 조건을 인위적인 노력으로 충족시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 것으로서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임을 밝히신다.
'가서 ~ 팔아 ~ 주어라'
여기서 나오는 세 동사는 모두 부정(不定)과거 능동태 명령형인데, 희랍어에서 부정과거 명령형은 계속 반복되는 동작을 명령하는 현재 명령형과는 달리, 일회적인 동작을 명령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지금 당장 가서 단번에 모든 것을 팔아 다 나누어 주라는 매우 강력하고도 신속을 요구하는 명령인 것이다.
즉 재물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끊어 버리고,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의 구제를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으로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 하느님의 나라를 최우선적인 가치로 삼아 그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말이다.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보물'에 해당하는 '테사우로스'(thesauros; treasure)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보물'이 상징적으로 쓰일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것을 가리키며, 쉽게 사라져 버리고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없는, 이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등과 같은 세속적인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지닌 '영원한 생명'을 나타낸다(마태13,44참조).
한편 '네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에 해당하는 '엑세이스'(ekseis; you will have)는 미래형이다.
앞의 '가서', '팔아', '주어라'의 현재 명령형을 지금 바로 행하여야 할 명령으로 알아듣고 실천할 때 미래의 영생이 보장됨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서, '팔아', '주어라'는 현재 실행해야 하는 명령들이 구원을 보장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현재 주어진 이러한 명령은 구원을 보증받은 성숙한 하느님의 자녀가 자연스럽게 생활 가운데 실천할 수 있는 구원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가서', '팔아', '주어라'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원을 보증받은 하느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영생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2025년 08월 18일 월요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김상우 바오로 신부)
이번 주간에 독서로 판관기를 읽습니다.
구약 성경은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로 나뉘고, 예언서는 다시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뉩니다.
전기 예언서에서 여호수아기 다음이 판관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열두 지파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그리는 판관기는 시기상 이집트 해방부터 가나안 땅 정착을 거쳐 왕정 출현까지를 다룹니다.
판관기의 신학은 무엇일까요?
이 책은 개별 판관들 시대의 전통과 그들에 관한 전설과 자료로만 구성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집니다.
곧 ‘죄-벌-회개-구원’의 논리 구조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 같은 우상을 숭배하며 ‘죄악’에 빠지고, 이는 하느님의 ‘징벌’을 불러옵니다.
어려움에 놓인 이스라엘의 ‘회개’는 판관으로 표현된 ‘구원자’의 파견을 부릅니다.
이는 왕정이 나타날 때까지 이스라엘 전체에 적용된 기본적 신학입니다.
그렇지만 판관기는 어떠한 역사적 연대도 직접적이거나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단순한 역사의 기록으로 볼 수 없지만, 판관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다른 사료와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관기가 전하는 전통들은 기원전 1200년에서 1020년 사이에 있던 것으로 짐작될 뿐입니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주인공들은 흠 없는 인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부도덕한 모습이나 당시의 현실은 독자에게 충격과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판관들의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에서 하느님 백성에게 주님의 영을 받는 임금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다양한 은사와 주님의 영을 충분히 받게 될 기름부음받은이로서, 곧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합니다.
구약의 메시아를 향한 기대는 마침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말씀 안에 생명, 성령이 있다”
복음(마태19,16-22)
16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 그런데, 앞 6절에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는 말씀으로 예수님과 우리의 혼인을 공부했다. 다시 기억해 보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께서 그 아버지를 떠나 여자인 교회, 우리와 한 몸(혼인)이 되시기 위해, 곡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는데 그 여자에게 흠(죄, 빚)이 많아 그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 하시고 흘리신 피의 새 계약, 그 물(말씀)로 씻어 아내로 맞으신 구원의 복음을 배웠다.
그러니까 구원, 하늘의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선(善), 의(義)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 그 은혜, 공로, 곧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믿어 거저 얻는 것이다.(티토3,5 로마3,20-24 참조)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람이 그 구원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인간의 의(義), 선한 일로 다시 묻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 시작이 ‘그런데~ ’로 시작된 것이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 선한 일을 묻는데 선하신 분으로 답하신다. ‘선’과 ‘선의 일’은 하느님 한 분께만 있다는 것을 알아라. 하시는 것이다.
곧 대속으로 죄인들을 용서하고 의롭게, 거룩하게 하는 것이 선이고, 그 선이 하느님께만 있다는 말씀이다. 계명들 또한 그 하느님의 선(대속의 사랑) 그 하나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계명들로 선, 그 하느님의 사랑(아가페) 하나를 깨달아 하느님의 계명이, 하느님의 사랑이 진리임을 믿음으로 마음에 간직하라(지키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래야 그 선(善), 계명으로 이웃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큰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어떤 것들, 곧 열(10)로 묻는다.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어떤 것들, 열(10)로 묻는 그에게 다섯(5)으로 답하시고 이웃사랑으로 마무리 하신다. 예수님은 탈출기의 십계명을 산상수훈에서 다섯(5)으로 주셨음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5,21-48참조) 그것은 십계명의 앞 다섯(5)과 뒤 다섯(5)은 같은 계명으로 하느님의 선(사랑), 그 하나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하느님의 선(대속의 사랑)을 주는 것이 이웃에게 하늘의 생명을 주는 참 사랑인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많이 퍼 주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할 수 없다.
다시~ 계명 모두 하느님의 선, 그 하나를 말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선, 사랑인 십자가의 대속으로 희생 제사를 예수께서 다 이루셨으니 계속 제사 행위를 한다면 예수님의 대속, 그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살인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남편인 예수님과 분리된 이혼, 불륜, 간음인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선)으로 받는 구원을 빼앗는 도적질이며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어머니)뜻에 불효하는 것이며 그러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젊은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하느님의 선, 그 사랑 하나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열(10)로, 십계명으로 알아듣고 답(答)한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 하느님의 계명을 인간의 계명, 도덕과 윤리로 또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종교적으로도 다 지켰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의로움)로 구원,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도대체 알아듣지 못한다. (인간의 선, 의로움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며 유효한 것이다)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 자신이 쌓은 재산, 곧 인간의 재산인 명예, 의로움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열 개의 계명으로 쌓아 놓은, 그 자신의 의로움이 구원의 가치 없음, 무력함을 깨닫고 인정하는 그 자기 버림으로 하늘의 보물, 곧 하늘의 용서, 의로움으로 받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인간의 돈, 재산을 팔아 이웃을 돕는 것은 율법의 선(善), 인간의 의(義)다)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인간은, 자기 의, 명예, 영광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할복도 하고 순교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 영광을 위해서는 스스로 절대 자신의 의, 영광을 버리지 못한다. 오늘 젊은이가 그 사람이다. 말씀(성령)께서 주셔야 할 수 있다.
(1테살2,13)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골로1,29) 29 이를 위하여 나는 내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받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에페3,20)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필립2,13) 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 다시, 본문 16절로~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의, 어떤 일을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 앎으로 받는 것이다. (요한3,13-16.36 4,14 5,39참조)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알고, 아는 것, 앎(야다- 함께 눕다), 안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곧 하느님께서 홀로 창조 이전에 우리의 구원을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시고, 그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곧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상의 나를 버리고(否認)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머리)으로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이 ‘알고, 아는’ 앎이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결론 - 말씀 안에 머물러 깨닫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1코린2,10)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요한2,27)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성령)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 은총의 보호자 성령님!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 될 때 까지,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시며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해 주신다 하셨으니 자기부인의 삶으로 하늘의 생명을 저희 안에 이루실 것을 희망하며 감사드립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