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화요일]따름과 보상 (마르 10,28-31)

2019. 3. 5. 오전 4: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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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8주간 화요일]따름과 보상 (마르 10,28-31)

 


집회서의 저자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라고 한다. (집회 35,1-15)
1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2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3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4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5 악을 멀리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속죄하는 것이다.
6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7 사실 이 모든 것은 계명에 따른 것이다.
8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그 향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
9 의로운 사람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그 기억은 잊히지 않으리라.
10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11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12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13 주님께서는 갚아 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14 그분에게 뇌물을 바치지 마라. 받아 주지 않으신다.
15 불의한 제사에 기대를 갖지 마라.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버린 것들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마르 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제1독서(집회35,1~15)

 

집회서는 지혜와 이스라엘 전통 사상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집회서의 신학 사상 중 가장 주목할 내용은 하느님의 지혜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곳 모세의 율법이라고 본 것, 율법과 지혜를 동일시했다는 점이다(집회 24,23~34).


따라서 집회서가 제시하는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기는 가장 쉬운 방법율법에 절대적으로 충실하게 사는 것뿐이다(집회1,26;6,37;19,20.24).


특히 오늘 독서의 말씀은 율법과 계명 준수감사의 제사와 자선의 행위와 관련지으면서 그것이 악과 불의와 거리가 먼, 의로운 영혼 상태에서 이루져야 함을 계시한다.


"주님 앞에 빈 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사실 이 모든 것은 계명에 따른 것이다.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  의로운 사람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그 기억은 잊히지 않으리라.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것 바쳐라.  주님께서는 갚아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집회35,6~13)    


오늘 독서 말씀에서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라고 촉구하신다.

사실 소출과 수입의 열의 하나를 봉헌하는 것은 내가 수확한 것과 수입의 주권과 절대권이 우리 인간을 영육간에 늘 돌보아 주시는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내 자신이 땀흘려 일하고 지혜를 짜내고 해서 이만큼 힘겹게 얻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건강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돌보아 주신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이고 봉헌의 영성이다.


그러니까 돈의 액수를 넘어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주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 봉헌과 십일조의 정신이며, 인본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를 기쁘게 기꺼이 하면 갚아주시는 주님께서 일곱 배(집회35,13)로 갚아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일곱배는 백만원을 봉헌했으면 일곱 배인 700만원으로 갚아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안의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과 '충만'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주님 대신에 사람이 계속해서 주님 뜻대로 주님께서 주신 재화를 잘 쓰면 한없이 충만하게 그 이상으로 흘러 넘치도록 베풀어 주시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덮어놓고 십일조를 하면 일곱 배로 베풀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집회서 35장 8절과 9절을 보면 '의로운 이의 제물'이라고 전제 조건이 붙어 있다. 말하자면 대죄가 없는 은총지위에서 십일조를 봉헌할 때 일곱 배로 갚아주신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영이신데, 동물의 번제물과 그 향기를  왜 드시고 맡으시며, 돈이 왜 필요하시겠는가!


다만 제물은 인간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드리는  찬미와 감사와 속죄의 제사와 관련되기에 우리 인간을 거룩하신 주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만드시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늘 우리 인간들 자신의 삶속에 주 하느님을 참 주인과 참 부모로, 살아계신 주님으로 모시고 살으라는 하느님 중심의 사상(신본주의; 神本主義)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10,28-31)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29~30)


마르코 복음 10장 29절'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라고 기록되었지만, 마태오 복음 19장 29절에서는 '내 이름 때문에'라고 기록되어 있고, 루카 복음 18장 29절에서는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내 이름', '나와 복음', '하느님의 나라'다같은 의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며,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때문에', '~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헤네켄'(heneken; for; for sake)전치사 '헤네카(heneka)소유격인데, 여기서 두 번 언급된 것은  전치사와 함께 쓰인 단어들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예수님 당신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족이나 집 등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는 것만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버린 사람'에 해당하는 '호스 아페켄'(hos apheken; one who has left)통해서 외적 및 내적 분리를 의미하는 포기를 가르치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내어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갈 수 없다는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 속으로부터 진정으로 예수님을 가장 소중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되는 절대적인 기본 조건인 것이다.


한편, 마르코 복음 10장 30절의 '백 배'(a hundred times)는 반드시 산술적 의미의 백 배가 아니며,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내어버린 것의 백 배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많은 보상을 받게 됨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 보상도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그것보다 휠씬 더 소중한 영적인 축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그 보상이 현재와 이 세상의 삶이 끝 난 후 오는 세상인 내세 (미래)에 모두 받게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맛보며 살고,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혈육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떄로는 핍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은 영적으로 더 많은 가족을 얻으며, 마음 속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을 주님 안에서 누리고 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참된 내용인 것이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예수님을 위해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풍요'만이 아니라 '박해'도 겸해서 받는다는 내용이 여기 마르코 복음에만 나온다.

여기서 '박해'에 해당하는 '디오그몬'(diogmon; persecution)원형'디오그모스'(diogmos)이다.


신약에서 '디오그모스'(diogmos) 말고도 '박해'를 나타내는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코린토 1서 4장 12절에 나오는 '블라스페메오'(blasphemeo)라는 동사이다. 이 동사의 뜻은 '비난하다', '중상하다', '헐뜯다'이다.


이 두 단어는 의미상으로는 모두 '박해', '핍박'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세부적으로는 '블라스페메오'(blasphemeo)'말을 통한 박해'이고,  '디오그모스'(diogmos)'구체적인 행위로 가해지는 박해'를 가리킨다.


여기 본문에서는 '~중에', '~가운데',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메타' (meta; with)와 함께 쓰였는데, '메타 디오그몬'(meta diogmon; with persecution)'박해 중에', '박해 가운데'라는 뜻이 된다.


이 말이 공관 복음서 중에 마르코 복음에만 기록된 것마르코 복음사가가 자신의 일차적 독자인 로마 신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로마에 있는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황제 네로의 극심한 박해 속에 있음을 알고, 그들이 겪고 있는 박해가 그리스도인이면필연적으로 겪어야 되는 것임을 강조하며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 내용을 부각시켰다(마태5,10~12).



-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희망!” -
- 2014.3.4 연중 제8주간 화요일                                   
- 1베드1,10-16 마르10,28-31

오늘은 ‘희망’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희망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희망해서 사람입니다. 사람만이 희망합니다.
희망이 빛이라면 절망은 어둠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나이 들어 갈수록 희망을 잃고 절망의 어둠 중에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살기위해 기도해야 하듯이 살기위해 희망해야 합니다.
희망을 잃음과 동시에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심신(心身)입니다.

과연 나의 희망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자문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자치수도원 승격을 앞두고 만든 수도원 문장 역시 아래는 산,
위의 하늘 배경 그림에 한데 어우러진 '십자가와 성체'가 흡사 온 누리를 비추는
별처럼, 태양처럼 보입니다. 바로 희망의 별, 희망의 태양이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안팎을 환히 비추는 희망의 별, 희망의 태양,
주님께서 우리 모두 절망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나는 희망을 살게 합니다.
지난주일 화답송 시편 다음 대목이 은혜로웠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구원이 오리니, 내 영혼 그분을 고요히 기다리네.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시편62,2-3)“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희망이 오리니, 내 영혼 그분을 고요히 기다리네.
그분만이 내 바위, 내 성채.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시편62,6-7).

구원의 하느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희망이 우리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이런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어야 존엄한 품위의 삶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을 희망할 때 저절로 거룩한 삶에 안정과 평화요
욕망을 절제할 힘도 생깁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다음 베드로의 권고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1,13-15).베드로의 체험적 고백입니다.
욕망 따라 살지 않고 순종하는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 주님께 대한 희망뿐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욕망의 절제도 순종의 삶도 거룩한 삶도 불가능합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희망 있어 오늘 복음에서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믿고 따른 베드로였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오로지 주님만 희망했기에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 베드로였고
우리 수도자 또한 그러합니다. 종신서원식 때 ‘봉헌노래(sucipe)’가 생각납니다.
성전 제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받으소서. 그러면 나는 살겠나이다. 주는 나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 되어 달라는 간원의 기도입니다.
대부분 울먹이며 눈물 글썽이며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님을 항구히 희망할 때 주님은 온갖 축복으로 응답하십니다.
복음 말씀에서처럼 주님은 현세에서의 무한한 축복과 더불어 내세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 확약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희망을 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축복을 선사하십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가 우리에겐 영원한 생명, 영원한 희망의 표징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희망을 둔 사람!”(시편34,9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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