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월요일]영원한 생명(마르 10,17-27)

집회서의 저자는,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리라고
한다. (집회17,24-29)
하느님께서는 24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인내심을 잃어버린 자들은
위로하신다.
25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 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
26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너는 그분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을 혐오하여라.
27
살아서 감사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누가
저승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찬미를 드리겠느냐?
28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이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리라.
29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마르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제1독서(집회17,24~29)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너는 그분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을 혐오하여라." (25~26)
집회서의 신학적 주제들 중에 하나가 '자유의지'에 관한 가르침이다. 동일선상에 있는 선과 악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구약 성경에서 집회서는 처음으로 인간을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고 선언한다 (집회15,11~20). 하느님께서는 인간 스스로 원하는 대로 살아가도록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신다(집회15,14).
따라서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을 택할 수도 있고 악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주어져 있기에 집회서는 인간의 윤리적, 신앙적 책임을 강조한다(집회4,20; 17,25~32 참조).
오늘 독서의 말씀이 집회서 17장 24~29절인데, 진리를 깨닫는 능력인 지성으로 지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바로 깨닫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 자유의지의 선용으로 깨달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25)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너는 그분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을 혐오하여라.' (26)
이러한 맥락에서 집회서가 가르치는 개념 중 가장 부정적인 것은 '죄'와 '악'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에 빠지는 무책임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집회13,8; 15,7; 19,11~12 등등).
그러면서 집회서는 '예배'의 신학을 전개하는데, 참된 예배는 결국 지혜를 추구하는 일이기에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집회17,25; 39,12~35).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 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25)
'살아서 감사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누가 저승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찬미를 드리겠느냐?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이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리라.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 (27~29)
하느님의 절대적 생명의 말씀에 승복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자비와 용서로 표출되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그것을 감사와 찬양의 기도로 드러내는 진정한 예배를 봉헌할 수 있음을 계시해 주고 있다.
연중 제8주간 월요일
복음(마르10,17~27)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1)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여기서 '부족한 것이 있다'에 해당하는 '휘스테레이'(hysterei; lack)는 '휘스테레오'(hystereo) 동사의 현재형이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계명을 다 지켜 왔기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예수님께 자신있는 말투로 대답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계명들을 다 지켰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현재형 동사로 사용해서 지적한 것이다.
동사 '휘스테레오'(hystereo)는 생활 형편과 관련해서 '부족하다', '모자라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부자 청년은 물질적인 부족이 없었기에, 이 '부족'이라는 단어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생소한 단어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물질로는 풍요로와도 그것은 진정한 풍유로움이 아니며, 오히려 부족함이라는 사실을 그의 허점을 찔러 지적한 것이다.
마르코 복음 10장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4~10계명만을 언급하셨다.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 사랑과 관련된 것으로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가야 할 수평적 사랑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율법을 준수한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 내면적 순종에 따른 진실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부자 청년이 집착하고 있었던 물질과 관계된 표현을 사용해서, 그의 부족한 것이 내적 순종에서 비롯되는 진실된 사랑과 자기 희생임을 깨우치시는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여기서 '바늘귀'에 해당하는 '트뤼페마토스 라피도스'(trypematos raphidos; the eye of a needle)를 예루살렘 성(城)에서 주로 밤에 이용되던 속칭 '바늘귀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문은 입구가 너무 좁고 낮아서 낙타가 걸어서는 통과할 수 없으며, 짐을 지고 있을 때에는 더 그러했다.
따라서 낙타는 모든 짐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은 채 이 문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워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두번째로 '낙타'에 해당하는 '카멜로스'(kamelos; a carmel)을 '밧줄'을 의미하는 '카밀론'(kamilon)으로 이해하는 입장인데,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더 쉽다'에 해당하는 '유코포테론'(eukopoteron; easier)은 비교급인데, 이 비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 이야기가 만약 여기서 끝나 버린다면, 오늘 복음의 주제는 부자는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전날 밤 겟세마니 동산에서 또 한 번 사용하십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참조).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기에 예수님을 위하여 다른 길을 마련해 주실 수도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원하시는 바를
실현하는 분이시고, 예수님 역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고자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서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예수님과 달리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고유하게 마련해 놓으신 그 길을 걷지 않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은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써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옛날 도자기를 시장에 내다 파는 멕시코 인디언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유한 관광객들이 지나가던 인디언들에게 물건을 모두 좋은 값에 사겠노라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들은 그 제의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네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읽거나 쓸 줄을 모른답니다.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라디오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소식을 알려면 매주 누군가가 도시로 나가야 하는데, 팔 도자기가 없으면 시장에 자리 잡고 앉을 수도 없답니다.
그러니까 이 도자기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 당신들에게 전부 팔수는 없습니다.
선생님네들, 우리가 달랑 돈만 가지고 마을로 돌아가면 욕을 먹는
답니다. 라고 말입니다.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네 삶에서 물질이란 필요하고 좋은 것임에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물질에 만족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거나
집착하는 데서 야기됩니다.
복음에서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재물을 하느님보다 낫게 여기며 재물 때문에 하느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는, 하느님 위에 재물을
놓고 재물에 집착하는 청년을 통하여 오늘날의 우리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권고 합니다.
어느 종교 잡지에
“그렇지만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기도문이 실렸었다.
“주님이 말하라는 대로 말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장사할 때는 예외로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매 주일 교회에 가는 것만큼은 예외로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바치라는 대로 헌금을 바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체면 유지 정도로만 조정해도 된다고 해 주십시오.
주님이 짊어져라 하시는 대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짐꾼을 사서 대신 지게 해도 그게 그거겠지요?
주님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대로 사랑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지금 당장 하라고는 마시고 내일로 미루어 주십시오.
주님이 봉사하라고 하시는 대로
봉사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봉사는 다른 이가 해도
되겠지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기도입니다.
현실과
신앙의 삶에서 갈등하는 우리네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세속적인 물질, 명예, 쾌락 때문에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에
집착하여 살고 있기 때문에 알면서도 “그렇지만 주님, 그렇지만 주님... ” 하는 우리의 삶이라면 꾸불어진 밭고랑이 되듯 꾸불어진 인생길을 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그렇지만 주님...”하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참된 보물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얻는 것처럼 변화하고 일시적인 행복에 만족하기 보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하느님의 보물,
하느님의 나라 곧 영원한 생명을 차지 하도록 합시다.
박명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