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간 수요일] 요나의 설교 (루카 11,29-32)

2016. 2. 17. 오전 5: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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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간 수요일] 요나의 설교 (루카 11,29-32)


니네베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니네베의 멸망을 선고하신다. 요나가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심판을 알리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모두 단식하며 회개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회개를 보시고 마음을 돌이키신다.(요나 3,1-10)
주님의 말씀이 1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6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7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시편 51(50),3-4.12-13.18-19(◎ 19ㄴㄷ)
◎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요구를 거절하신다. 요나의 표징,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이 믿음의 근거가 될 것이다. 이 세대에게는 이 표징 이외에 다른 표징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이 표징을 보고 믿지 못한다면 불행할 것이다.(루카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요나3,1~10)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요나3,5~6)


3장의 내용은 요나가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니네베에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임금을 비롯하여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모두 회개하고 그것을 보신 주님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니네베의 회개는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임금부터 용상에서 일어나 용포를 벗고 자루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단식'(촘; tsom; fast; fasting)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는데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곧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도 좋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하느님 앞에서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악을 크게 회개한다는 표시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자 행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니네베 사람들 역시 죄악을 크게 회개하였고 장차 철저한 멸망에 이를 수 있는 현실적 정황 앞에서 하느님의 용서와 보호의 은총을 구하여 위기를 타개하고자 단식을 단행한 것이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5)  여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니네베의 왕을 지칭하며, 가장 낮은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비천한 자들 아마도 노예로 분류되는 사람들 지칭하는 표현일 것이다.

'자루옷'(굵은 베옷)에 해당하는 '삭킴'(saqim)의 원형 '사크'(saq)조직이 매우 거친 삼베 말한다. 이것은 장례식에 입거나(창세37,34; 2사무3,31) 국가적 재난을 당할 때(에스테르4,1) 극심한 심적 고통을 표현하고자 할 때(2열왕21,27) 입었다.

이처럼 평상시 입는 옷을 벗고 거친 베를 몸에 걸친다는 것은 일체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거부하고,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진심으로 회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6) 당시 니네베 왕은 아시리아 제국 전체를 통치하던 샬만에셀 4세(Shalmaneser IV; B.C. 782-773), 혹은 앗슈르단 3세(Asshurdan III; B.C. 772-755)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니네베 왕이 주 하느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 진실로 겸비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는 하느님 대전에 더 이상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왕좌에서 일어나 왕의 권위를 겉으로 드러내는 자신의 왕복까지 벗고 대신 자루옷 입었다.

그는 왕좌에 앉는 대신에 잿더미위에 앉았다. '재'에 해당하는 '하에페르'(haeper)의 원형 '에페르'(eper)는  흩어 뿌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물질이 완전히 연소되고 남은 매우 가벼운 분말 상태의 찌꺼기인 재(ash)를 의미한다(민수19,10).

고대 근동에서 사람이 재 위에 앉거나 재를 뒤집어 쓰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극심한 육체적, 심적 고통을 나타내거나(2사무13,19; 욥2,8),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의 은총을 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 행동이다(다니9,3).

당시 세계 최강의 권세를 자랑하던 아시리아 제국의 최고 통치자가 자루옷을 걸치고 잿더미 위에 앉았다는 것은 아시리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 누구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서쪽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온 이름없는 한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 그렇게 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비천함과 하느님의 심판 대전에 무기력함을 절감하고 그 모든 권세와 권위를 하느님 대전에 내려놓고 오직 주 하느님만을 최고의 신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그에게 은총을 구했다. 

이러한 아시리아 왕의 태도는 실로 하느님 대전에 은총을 구하는 자, 회복을 간구하는 자가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좀 더 근본적으로 하느님 대전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 누구나  마땅히 창조주 하느님 대전에 취해야 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온 국민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 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으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3,7-8) 

고대 근동에서는 나라에 매우 큰 위기가 닥쳤거나 최고 통치자가 서거했을 경우 사람들 뿐 아니라 이성이 없는 우매한 가축들 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는 관행이 있었다. 니네베 성읍 전체의 모든 생명체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 모두 다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단식을 통해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7~8절은 니네베 읍성 백성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한 방법 네 가지가 제시된다. 그것은 음식 뿐만 아니라 물까지 입에 대지 않는 완전한 단식, 자루옷(굵은 베옷)을 입는 것, 하느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 각기 악에서 떠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네번째 사항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즉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8) 바로 이것 때문에 심판이 닥쳤으므로 백성들에게 악과 폭행을 버리고 선한 길로 돌이키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돌아서야 한다'에 해당하는 '웨야슈브'(weyashubu)의 원형 '슈브'(shub)는 어원적으로 가던 방향을 돌이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창세8,12).

본문에서는 악한 행위와 폭행을 버리고 과거의 그러한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회개란 단순히 악을 버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데까지 나아가야 완전한 회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폭행'에 해당하는 '훼하마스'(whehamas)의 원형 '하마스'(hamas)는 어원상 강한 힘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죄악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로 멸망당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죄악이었다(창세6,11.13). 어떤 예언서에도 니네베 사람들처럼 이토록 진지하게 회개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학계 지도자들이 권력과 돈과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또한 악한 법과 구조와 제도를 가지고, 얼마나 하느님의 신법과 자연법을 거스리며 나쁜 짓을 하고 하고 있는지 모른다. 스스로 하느님의 의노를 초래하고 있는 나라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높은 데서 권력과 돈을 이용해 불볍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낮과 밤의 다른 생활, 아니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완전히 다른 철저한 이중생활, 야누스적 생활을 하면서 감히 서민들이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맛있는 것들을 먹고 마시고 최고의 사치와 향응과 쾌락과 스포츠를 즐기며 하느님과 백성들 무서운 줄 모른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통탄할 일이다.

참으로 이 시대는 임금부터 저기 보이지도 않는 잡초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속속들이 썩어 버린 것을 도려내야 하는, 온갖 부패와 불법과 불의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하느님의 벌을 받지 않고 망하지 않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께서 남겨두신 이들 때문이다.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희생하며 보속하는 몇몇 의인들과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회개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회개가 정말로 필요한 때이다.



<믿음, 회개>  송영진 모세 신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몰라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안 믿고, 그래서 복음을 거부합니다.
또 자기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해서 회개도 거부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악한 세대'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것은,
어떤 놀라운 기적 같은 것을 통해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보았고, 놀랐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기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살아난 일을 가리킵니다(요나 2장).
여기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들이 한 말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시오." 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다." 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복음 선포 활동을 할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또 부활을 증명하라고 요구했을 텐데,
예수님 부활에 대한 물적 증거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인들의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로 바뀌게 됩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증명하기 위한 기적을 행하는 것을 거절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것은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기 싫어서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표징을 보게 된다고 해도 그 표징 자체를 안 믿을 것입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표징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표징'이라는 말은 앞의 말씀과는 조금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앞에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놀라운 기적"
이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서는 "구원받을 사람들과 멸망할 사람들을 가르는 계시" 라는 뜻입니다.
믿고 따르면 구원을 받고 안 믿으면 멸망하게 되는 신호등 같은 것.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요나서'를 보면, 요나는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고 외치기만 했습니다(요나 3,4).
그런데도 니네베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하느님을 믿었고,
단식하면서 회개했습니다(요나 3,5-9).
아마도 요나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 때문에 요나의 말을 믿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어떻든 낯선 예언자의 멸망 선포를 무시하지 않고,
바로 받아들여서 회개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멸망이 무서워서 그랬을 것이라고 깎아내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그들이 회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즉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요나와 같은 인간 예언자가 아닌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멸망 예고가 아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셨는데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마저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은 것은 죄다." 라고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이 왜 죄냐?" 라고 항의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착하게 살았던 것을 인정해 주실 것이고,
정상참작을 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길'을 외면하고
다른 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예수님의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가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라는 것은 없고, 멸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
믿는다고 해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7,21).
참으로 믿는다면 하느님의 뜻을(사랑과 선행을) 실천할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는다면 입술로만 믿는 것이고,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과 회개입니다.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1,29-32)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29ㄴ~30)


악한 의도로 표징을 구하는 자들(루카11,16)에게 예수님께서 진정한 표징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 내용이 루카 복음 11장 29~36절에 전개된다. 여기서 '세대'로 번역된 '게네아'(genea; generation)혈통 또는 동일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라고 표현하고 있다(마태12,39). 사실 표징을 구하는 행위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이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냈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순종하지도 않고서도 또 다른 표징을 구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표징만을 구하는 것을 진실된 마음의 결여로 보고, 진실된 마음의 결여는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신실함의 상실이기에 이것을 '영적 절개없음'으로 보고 악하다고 질책하신 것이다. 또한 '표징'을 뜻하는 '세메이온'(semeion; a sign)은 여기서 어떤 것을 구별해 주는 기적적인 '증거'(token)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아주 궁금해했으며, 예수님께서 마귀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베푸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베푸는 것인지 판단하고 식별할 수 있는 '표징'을 구한 것이다.

그리고 '요구하지만'에 해당하는 '제테이'(zetei; they seek)는  '발견할 때까지 찾다'를 의미하는 원형 '제테오'(zeteo)현재 직설법으로 쓰여서, 이들이 예수님께서 표징을 보이실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구했다는 사실을 묘사해 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신앙의 마음으로 메시야로서의 표징을 구하는 이들에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보일 표징이 없다고 하시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마태오 복음 12장 40절나오듯이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나가 실제로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증거로서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머물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된 후에 니네베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감당하여, 그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징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그리스도, 즉 약속된 구원자로서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사흘 만의 부활로서 명확하게 입증하겠다는 이다(사도1,3; 17,31).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의 사건이 메시야되심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징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 루카 복음 11장 30절을 본다면, 이것은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복음 9장 22절의 첫번째 수난 예고에 이은, 또 하나의 간접적 수난 예고로 볼 수도 있다.



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표징도 주어지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시지만(8,11-12 참조), 오늘 봉독한 루카 복음에서는 그래도 요나 예언자의 표징만은 주어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표징 요구를 거절하시는 것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려고 다른 어떤 놀라운 이적을 보여 주기를 거부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요술이라도 보여 주어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만들어야 할까요? 믿음은 그런 것들에 기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에게 다만 한 가지를 보여 주신다면 그것은 요나의 표징, 곧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서 니네베로 가게 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놀라운 일이 아닌 그분의 죽음과 부활만이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보듯이, “이 세대”는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솔로몬이나 요나에게 귀를 기울였던 과거의 이방인들처럼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이 세대”는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에 살던 세대만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며, 자칭 신자들인 우리도 해당됩니다. 실제로는 우리 신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파스카의 신비를 믿지 못한다면,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더 거창한 기적을 베푸시거나 더 쉬운 지름길을 알려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끌어 주셔야만 부활 신앙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신앙에 이를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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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목요일]부자와 거지 라자로 (루카 16,19-31)16.02.24조회 76[사순 제2주간 수요일] 그래서는 안 된다 (마태 20,17-28)16.02.24조회 106[사순 제1주간 수요일] 요나의 설교 (루카 11,29-32)16.02.17조회 49[(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주님의 기도 (마태 6,7-15)16.02.16조회 410[(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최후의 심판 (마태 25,31-46)16.02.15조회 430[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나를 따르라 (루카 5,27-32)16.02.13조회 364[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단식 (마태 9,14-15)16.02.12조회 90[(자)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루카 9,22-25)16.02.11조회 51[(자) 재의 수요일]단식과 자선과 기도 (마태 6,1-6.16-18)16.02.10조회 84[연중 제5주간 화요일] 조상들의 전통 (마르 7,1-13)16.02.09조회 535[연중제5주간월.설날 ]깨어있는 삶 (루카 12,35-40)16.02.08조회 88[연중4주간토요일] 가엾은 마음 (마르6,30~34)16.02.06조회 47[연중4주간 금요일]세례자요한의 죽음(마르코 6,14-29)16.02.05조회 47[연중 제4주간 목요일] 파견 (마르 6,7-13)16.02.04조회 112[연중 제4주간 수요일]고향방문 (마르 6,1-6)16.02.03조회 129[2월 2일 화요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2,22-40)16.02.02조회 105[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마귀와 돼지떼 (마르코 5,1-20)16.02.01조회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