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수요일] 그래서는 안 된다 (마태 20,17-28)

2016. 2. 24. 오전 5: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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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수요일] 그래서는 안 된다 (마태 20,17-28)

섬김을 받으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레미야를 없애려 한다. 그가 심판을 선고하며 회개를 호소하는 것을 듣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그 백성에게서 하느님의 분노를 돌이키려 했으나 백성은 이를 알지 못한다.(예레미야 18,18-20)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18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
19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시편 31(30),5-6.14.15-16(◎ 17ㄴ 참조)
◎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
○ 정녕 저는 많은 이들의 비방을 듣나이다. 사방에서 두려움이 밀려드나이다. 저에게 맞서 그들이 함께 모의하고, 제 목숨 빼앗을 음모를 꾸미나이다. ◎
○ 주님, 저는 당신만 믿고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 운명 당신 손에 달렸으니,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다.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고관들처럼 살아서는 안 되며 다른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마태 20,17-28)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예레18,18-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20) 

예레미야서 18장 14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문문을 이끄는 의문사'하'(ha)서두에 나와 본문을 수사 의문문으로 이끌고 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의 현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음예레미야는 주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멸망으로부터 동족을 구하려는 열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한편, 주님께 이 백성을 위한 중재(중보)기도 올렸다(예레14,7~15,9). 그런데도 이 백성은 오히려 그를 핍박하고 목숨을 해치려고 구덩이를 파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는 이 백성의 포악한 행태를 참다 못해 주님께 아뢰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심을 간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그에 대한 책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성경에서 '구덩이' 숨을 수 있는 '굴'(2사무17,9)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감옥','저수 동굴'(예레38,1~13), '웅덩이', '함정', '구렁'(시편35,7), '올무','올가미','덫'(시편140,6)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도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는데, 일차적으로는 '함정'이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그러나 더 나아가서 '감옥' '매장지'라는 의미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남부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를 저수 동굴(구덩이로 된 감옥)에 가두었고(예레38,1~13)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표현은 그들이 단지 예레미야를 적대시하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그를 해치고 제거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제가 당신 앞에 서서'에서 '서다'라는 뜻의 동사 '아마드'(amad)일차적으로 '서다'란 육체적 행동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구약 성경에서 본문처럼 '주님 앞에 서다'라는 표현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중재(중보) 기도의 자세를 나타내는 문구이기 때문이다(창세18,22; 신명4,10).

예레미야는 '주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그들을 위해 복을' 주님께 고하며 중재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해 줄 것을 주님께 간청한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이 주님 앞에서 옳게 행했음을 변론하는 것 아니라 오히려 선을 악으로 갚는 백성의 거역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향하여 하느님께서 판단하시고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20,17-28)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기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26~28)

'너희 가운데에서'에 해당하는 '엔 휘민'(en hymin; among you)이란 표현은 제자들을 다른 대상과 구분짓는 말로서, 이미 제자들은 이 세상 나라와는 구별되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천국의 본질과 관련해서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치신다.

여기서 '섬기는 사람'으로 번역된 '디아코노스'(diakonos; minister; servant)'심부름을 가다'라는 뜻이 있는 '디아코'(diako)에서 유래하여 '일꾼', '하인'(요한2,5.9), '하인'(마태22,13)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초대 교회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자를 가리키는 '봉사자', '집사' (필리1,1; 1티모3,12)라는 호칭이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마태오 복음 20장 27절에서 '첫째가'에 해당하는 '프로토스'(protos; first; chief)장소나 시간에 대해 '~보다 앞에'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프로'(pr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여기서는  지위나 계급 등에 있어서 '제일 높은 자'를 가리킨다.

반면에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doulos; servant; slave)'묶다'(마태13,30), '묶다', '결박하다'(마태12,29)라는 뜻이 있는 동사 '데오'(deo)에서 유래하여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된 '노예'(slave)를 의미한다. 종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상대방을 섬기는 자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위의 마태오 복음 20장 28절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신 목적만을 밝히시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합당한 자질을 갖도록 촉구하는데 있다.

여기서 '몸값'에 해당하는 '뤼트론'(lytron; a ransom)'풀다'(마태16,19),'벗다'(사도7,33) 등으로 번역되는 '뤼오'(lyo)에서 유래하여 '의무나 속박에서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타인의 속박아래에 있는 노예나 죄수에게 자유를 부여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죄와 죽음의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여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속박을  끊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 대신하는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의노를 풀어드리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와 위격이 같으신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죄지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대속(代贖; Redemption)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대속물로서 죽으신 것은 '많은 이들'을 위해서이다. '많은 이들'로 번역된 '폴론'(pollon; many)의 원형 '폴뤼스'(polys)수적으로 많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길다는 뜻과  정도에 있어서 광범위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모든'이라는 뜻이 있는 '파스'(pas)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데에 유념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마가복음 10장 45절)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송영진 모세 신부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 20,18-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신 말씀인데,
말씀을 하신 뒤의 상황을 첫 번째 예고 때의 상황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을 때(마태 16,21),
베드로가 예수님을 말리다가 혼나는 일이 있었습니다(마태 16,22-23).
지금 세 번째 예고 때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하고 있습니다(마태 20,20-21).
(마태오복음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야고보와 요한이 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실 때,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청한 일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것 자체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높은 자리를 욕심내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주님이시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왜 그런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에는,
수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부활 예고 말씀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는, 예수님의 말씀 전체를 흘려듣고, '낙타와 바늘구멍'에 관한 말씀 뒤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라는 말씀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청하는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는(마태 20,21)
사도들이 앉게 되는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뜻합니다.
두 사도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예고를 하신 뒤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예고 때에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라고 물으셨습니다.
'잔'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 '잔'을 마시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이 됩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일에 속합니다.)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는데(마태 20,24), 이것은 다른 열 제자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높은 자리를 욕심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는 말이 나옵니다(루카 22,24).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런 내용들은
사도들의 부족한 모습들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권력욕과 명예욕 등은 십자가의 반대쪽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도들을 이렇게 타이르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 20,25-26ㄱ)."
'너희도 알다시피' 라는 말씀은, "너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듯이"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른 민족들'이라는 말은 이방 민족들이 아니라, '세속'을 뜻합니다.
세속에서는 통치자들과 고관들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들 더 높은 권력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는 너희는 세속의 사고방식을 따르면 안 된다." 라는 뜻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ㄴ)." 라고 가르치시는데,
이 말씀은, '높은 사람이 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마태 18,3).
따라서 그 나라에는 세속에서 생각하는 그런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다 '높은 사람'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열두 옥좌도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섬기러 오신 것은(마태 20,28)
나중에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섬기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즉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루카 1,51-52)"
권력으로 백성을 억압하는 통치자들 같은 교만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예 못 들어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해서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예레미야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예레미야의 말이 듣기 싫었겠지요. “그자가 없어도” 다른 사제들과 현인들과 예언자들은 듣기 좋은 말들을 해 줍니다.

우리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으니 안전하다고,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니 전쟁을 해도 우리는 망하지 않으리라고 말해 줍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렇게 살다가는 성전도 무너지고 완전히 멸망하리라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듣기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귀에 거슬립니다. 남들 사는 대로, 세상 돌아가는 대로 적당히 눈치 보면서 권력과 높은 지위를 추구하며 살고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남들은 그렇게 살더라도 너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옆자리라는 거룩한(?) 자리마저도 욕심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종이 되어야 한다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들이 생명의 말씀임을 알아보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멸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하느님의 진노를 돌리려고 애써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와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역시, 우리가 진정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기에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이들을 죽여 없앱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이들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생명의 길은 어디에 있고 그 길을 걷도록 진언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섬김 -현재훈- 프로슈코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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