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루카 9,22-25)
(세계 병자의 날)
교회는 해마다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고 있다. 이는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에서 비롯되었다. 성모님께서는 1858년 2월 11일부터 루르드에 여러 차례 나타나셨는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다. 이날 교회는 병자들의 빠른 쾌유를 위하여 기도한다. 또한 병자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도 함께 기억하며 병자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책임감을 다지도록 기도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법을 모두 가르쳐 준 다음, 그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도록 한다.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은 그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이시다. 그분의 뜻을 따르기를 선택할 때, 우리는 생명에 이른다.(신명 30,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시편 1,1-2.3.4와 6(◎ 40〔39〕,5ㄱㄴ)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목숨을 구하는 길이다.(루카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1독서(신명30,15~20)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5-16)
본문에서 '보아라'(레에; reeh)라는 말이 쓰인 것은 이제 최종적인 선택이 각 개인에게 남았으니 마지막으로 모든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너희 앞에'(레파네카; lepaneka;'네 얼굴 앞에'라는 뜻)와 '오늘'(하욤;hajom)이 전하는 뉘앙스는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의 두 길에 대한 제시가 매우 도전적이며 현재적이란 사실이다.
즉 결코 비밀속에 감추인 신비스러운 그 무엇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얼굴 앞에서 볼 수 있는 실제적인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제시하는 것이다.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 (15)
여기서 '행복'(복)으로 번역된 '토브'(tob)는 '좋은'(good)이라는 의미이며 정관사 '하'(ha)와 결합하여 '좋은 것' 또는 '선'(善)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행'(화)으로 번역된 '라'(la)는 '악'(惡; evil)을 의미한다.
여기서 '행복과 불행'은 '선과 악'을 말하는데, '선과 악'은 어떤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각각 율법에 순종하는 삶이 약속하는 '축복' ('번영'; 신명4,40; 5,29.33; 6,3.18.24; 10,13)과 그와 반대되는 '저주'(신명4,26; 8,19)를 말하는 것이다(신명11,26).
'축복'을 의미하는 '선'과 '저주'를 의미하는 '악'은 현세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에 '생명'과 '죽음'은 내세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예레미야 21장 8절에도 "이제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놓아 둔다."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두 길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여부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주어진 부가물이 아니라 우리 삶의 생명 자체이기에 비록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앞에 선택 사항인 양 주어졌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그 말씀을 지키는 것만이 생명을 위한 유일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16)
15절에 명사로 소개된 생명과 행복을 동사를 사용하여 한층 더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너희가 살고'로 번역된 '하이타'(haitha)는 '살다'는 뜻을 가진 '하야'(haja)동사의 2인칭형이다. '하야'동사가 풍기는 뉘앙스는 '생명과 존재를 지켜가다' 혹은 '생명을 소유하다' 이다.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생명과 존재를 지켜가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또한 '번성할 것이다'로 번역된 '라비타'(rabitha)는 '많아지다'란 뜻을 가진 '라바'(rabah)동사의 2인칭형이다.
'라바'동사는 특별히 수적인 증가를 나타내는 말로서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후손의 축복이(창세15,5)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볼 때 율법의 순종을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누리게 되는 궁극적인 축복은 생명과 계약 공동체의 백성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최종 목적지가 단순히 물리적이고 육적인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을 거쳐 새 예루살렘까지 향해 있음을 암시해 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자마자(루카 9,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기 시작하십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시라면 과연 어떤 그리스도이신지를,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제자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우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들과 달리 루카 복음에는 “날마다”라는 단어가 첨가되어 있는데, 이 한 마디 말씀이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오늘의 우리를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따라야 한다는 이 말씀은, 같은 시기에 예수님과 실제로 함께 살면서 그분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뿐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도 매일 일상의 삶 안에서 변함없이 요청되는 말씀입니다.
삶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2010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는, 4대강 사업과 관련하여 오늘의 독서 신명기 30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담화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정부가 그때 한 선택이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안타깝게도 지금 그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현안이지만 잘못된 순간적인 선택 때문에, 자연 산천과 우리는 물론 우리 후손들마저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을 통하여, 선택과 결단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현실적인 문제에서도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면,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미래의 선택은 과연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사순 시기 동안, 아니 일생 동안 우리는 생명과 죽음의 길 기로에서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당연히 생명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신명 30,19-20 참조). 행복과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은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 곧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3-25)"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살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또 이
말은,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예수님 뜻만 따라야 하고
자신의 뜻은 모두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보통 이
말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방해가 되는 '자아'를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하는데, 자아를 버린다는 말은 좀 막연한
표현입니다.
어떻든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더 추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을 버리는 일'의 모범이 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시몬 베드로가 했던 말도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한 그 일도
'자신을 버린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는 사실상 '매
순간 순간마다'입니다.
또는 '단 한 순간도 예외 없이'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은,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죽음도 각오한다는 뜻이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만 있는 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편안할 때도 있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만일에 편안함만 찾고 고통은 피하려고
한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에는,
각자 스스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기가 노력해서 얻어야 할 '자기의 생명'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현세적인 목숨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고"입니다.
물질적인 것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적인 은혜를 얻지 못하고,
지상의 것만 집착하는 사람은 하늘의 것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안 받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입니다.
여기서
'나 때문에' 라는 말은 중요합니다.
이 말은, '나를 위하여'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내가 주는 것을 받기 위하여'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는 많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종교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아니라면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닌 것은 모두 허무한 것입니다.
'온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온 세상의
먼지'를 다 얻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권력도,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허무한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허무한 것들을 버려서 영원한 것을 얻는 것은 참으로 '모든 것'을 얻는 일이 됩니다.)
제1독서 말씀을 보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30,19-20)."
모세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을
연결하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생명과 축복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힘들다고 해서 십자가를 피하고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는 것은
죽음과 저주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일이니 자기 책임입니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는
"주님만이 너희에게(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입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습니다.
그러나 참 생명을 원한다면, 주님께서 가신 그 길만 선택해야 합니다.
십자가보다 더 무겁고 힘든 것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여서
짊어지고
주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4~25)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하여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9,20)라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했지만, 그가 가진 메시아관은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만을 받는 메시아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임할 수난에 대해 처음으로 예언하셨을 때 (루카9,22) 강력히 반발하였다(마태16,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만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자는 누구나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9,23).
루카 복음 9장 23절에는 '날마다'에 해당하는 '카트 헤메란'(kath' hemeran)이라는 부사가 나오는데, 날마다 자신의 죄스런 본성과 결별하고 죽는 훈련을 거듭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9장 24절에는 '나때문에'라는 표현을 통해(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8장 35절에는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에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부하시고 '당신과 복음'에 더 우선적 가치를 두셨다.
한편, 이러한 역설적 진리는 역사 가운데 그대로 실현되었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사도들 중에 사도 요한만이 장수를 누렸을 뿐, 다른 사도들은 모두 순교하였다.
그들은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품었기 때문에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 복음이 쓰여지고 읽혀지던 초대 교회 당시의 극심한 박해와 핍박을 당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순교의 길을 선택하게 한 감동적인 생명의 말씀이 되었던 것이다.
루카 복음 9장 25절에서 '잃거나'에 해당하는 '제미오테나이'(zemiothenai; lose; forfeit)는 루카 복음 9장 24절의 '잃을','잃는'에 해당하는 '아폴레세이'(apolesei; will lose)와 다르다.
'제미오테나이'(zemiothenai)의 원형 '제미오오'(zemioo)는 신약 성경에서 여섯 번 나오는데 모두가 수동태로 쓰였으며, '손상을 당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부정사 수동태로 쓰여 '손상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루카 복음 9장 25절에서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친다'는 표현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제3자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상실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9장 24절의 '아폴레세이'(apolesei)가 스스로의 의지와 적극성으로 상실하는 것과 비교가 된다.
말하자면, 루카 복음 9장 25절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으려 하다가, 또는 이미 얻어 누리면서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목숨과 생명을 박탈당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는 교훈을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목숨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높은 가치를 두는,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할 영적 생명'을 말한다.
본문에 나오는 '목숨'(생명)에 해당하는 '푸쉬케'(psyche; life)는 바로 '영혼 생명'(soul)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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