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최후의 심판 (마태 25,31-46)

레위기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계명과 법령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근거한다. 거룩하신 분을 하느님으로 모셨기에,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거룩함은 정의와 사랑 등 우리 삶 안에서 여러 가지 실천들로 드러난다.(레위 19,1-2.11-18)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너희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12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너희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님이다.
17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18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시편 19(18),8.9.10.15(◎ 요한 6,63ㄷ 참조)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 곧 종말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인데, 당신께서 당신 형제들이라고 부르시는 가장 작은 이들에게 어떻게 해 주었는지에 따라 모든 이를 심판하실 것이다. (마태 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레위 19,1-2.11-18)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qedowshim thihyu ki qadowsh ani yehah elohekim"
케도쉼(holy) 티흐유(You shall be) 키(for, because) 카도쉬(am holy) 아니(I) 예흐와(the Lord) 엘로에켐(your God) "Be holy because I, the Lord your God, am holy"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로 번역된 '키 카도시 아니 예흐와'(레위11,44.45 ; 20,26)에는 동사가 쓰이지 않았다. 이렇게 원문이 동사가 생략된 문장이란, 사실은 하느님의 거룩함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거룩'이 본질이란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이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란 명령에는 '~ 이다', '~ 이 되다' 란 뜻을 가진 '하야'(haya)동사의 미완료 2인칭 복수형인 '티흐유'(thihyu)가 쓰였으며,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하느님의 간택을 받은 계약의 백성이지만, 본질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어야만 하는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룩(함)'(qodesh,코데쉬)이란 단어는 '속된 것에서 분리하다, 구분하다,구별하다, 성별하다'는 뜻의 동사 '카다쉬'(qadash ; to be clean, to purify)에서 유래되었다. 속된 것으로부터 계속 분리하고 구별하면, 그만큼 하느님께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거룩'이란 의미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흠없이 깨끗하고 순결함, 의로움, 무한히 완전함, 온전함'등, 초월성과 신비성을 포함하는,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만드는 하느님의 본질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하실 수 없는 거룩한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거룩함은 생동력을 가지고 밖으로 분출되며, 그분이 임재(臨在)하고 역사(役事)하시는 곳의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드신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조 아담과 에와로부터 원죄를 이어받은 인간으로서, 그 본질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은총이 결핍 상태이기에 죄를 품고 있으므로, 죄로부터 자신들을 멀리하여,하느님의 임재에서 나오는 거룩함을 체험함으로써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야'(haya)동사의 미완료형인 '티흐유'(thihyu ; You shall be)는 시제 자체가 말해주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거룩해져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더불어 미완료형에는 명령의 의미나 미완료적인 의미일 뿐 아니라, 약속의 의미도 또한 담겨 있다. 즉 본문 가운데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될 것이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룩'은 세상과의 물리적인 싸움이나 모든 인간 관계에서 초연한 삶을 삶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의 본질이신 하느님을 인생의 근본으로 삼고,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도를 실천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하느님 자신이 '거룩'의 본질이시기 떄문에(시편99,9 ; 이사6,3), 이스라엘 백성이 소유할 '거룩' 역시 진실하고 확실한 것이다.
"주 우리 하느님을 높이 받들어라. 그분의 거룩한 산을 향하여 엎드려라.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시다." (시편99,9)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이사6,3)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제들의 나라와 거룩한 민족'(탈출19,6)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상기시켜줌과 동시에 그 부르심 자체가 실제적으로 실현된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 3절부터 주님께로부터 모세가 받은 십계명부터 여러 율법의 규정들이 다양하게 전개된다. 이것은 인간 삶의 다양성을 반영한 것이며, 인간사의 모든 상황이 하느님의 율법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사랑 실천에 대한 심판> 송영진 모세 신부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오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하는 말입니다. '옥좌'는 하느님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리입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재판관의 자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들'은 글자 그대로 인류 전체를 뜻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류 전체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의 내용을
보면, 어떤 절차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고 바로 사람들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 세우는데, 이것은 이미 심판이(재판이) 끝난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재판 과정이 아니라, 재판 결과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즉
'선고'입니다.) 도대체 심판은(재판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판'에 관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이 말씀에서 '아들을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한 사람"을
뜻합니다. (믿기만 하고 실천은 안 한 사람은 안 믿는 사람과 같습니다.)
"심판을 받지 않는다." 라는 말은 재판 자체를 안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멸망을 선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았다." 라는 말은, '최후의 심판 날'이 되기도 전에 그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지금의 우리의 '삶'이
최후의 심판 때의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기 자신이 잘 압니다. 그러니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로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는 일은 없을 텐데... 그런데 복음 말씀을 보면, 의인들과 죄인들이 모두
선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런 선고를 내리시는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의
첫 번째 기준은, 또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랑 실천'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25,40.45).
(사랑 실천만 잘하면 다른 성덕이나
신심 같은 것은 다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다른 모든 성덕의 기초이기도 하고, 총합이기도 하고, 완성체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자기들이
사랑 실천을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마태 25,37-39)" 라는 그들의 말은, 자기들이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사랑을 사랑이라고 의식하지 않고, 또 선행을 선행이라고 의식하지 않고,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의인의 모습입니다.)
죄인들도 "주님, 저희가
언제...?(마태 25,44)" 라고 묻고 있는데, 그들의 질문은 의인들의 질문과는 뜻이 다릅니다. (새번역 성경은 "주님, 저희가
언제?" 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서는 "주님, 주님께서 언제?" 라고 번역했습니다. 뜻으로는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이
맞습니다.)
죄인들의 말은 자기들이 사랑과 선행 실천을 했다고 주장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불쌍한 처지에 있었음을 몰랐다고
변명하는 말입니다. (알았다면 실천했을 텐데, 몰라서 못했다는 변명.) 그들의 양심은 자기들이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의인들의 대화를 보면, 의인들은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들은 곧 주님이다." 라는 생각 없이 그냥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주었을 뿐입니다.사랑이 필요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일은 '그냥' 도와준 일입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이 주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그냥' 도움을 준 것뿐입니다(루카 10,33). 그것이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예수님과 죄인들의 대화를
보면, 죄인들은 자기 눈앞에 있는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가 그냥 무시해도 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외면해버린
사람들입니다.
만일에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가 자기 가족이라면, 또는 친한 사람이라면, 또는 나중에 자기에게 큰 보상을 줄 수
있는 높은(또는 부유한) 사람이라면, 그들은 금방 달려들어서 도움을 주려고 애를 쓸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카 6,32)." 이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그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라면, 그것은 죄입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라는 예수님 말씀은, "가장 작은 이들이 바로 나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에는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들의 과거의 삶이나 직업이나 신분이나 사상이나 이념 같은 것을
보지 말고, 지금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어 있는 상태만 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저 사람을 잘
아는데, 저런 나쁜 사람이 주님일 수는 없다." 같은 말을 하면서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태도가 심판 때에 자기 스스로 주님의 왼쪽에 서는 일입니다.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마태25,31~46)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히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엇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31~40참조)
마태오 복음 25장에는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사람의 자세와 관련된 세 가지 비유가 있다. 1~13절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는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사람의 준비성을 강조하고 있고, 14~30절에 나오는 '탈렌트의 비유'는 주님의 소명에 대한 성실성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31~46절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심판하시는 주님이 오셔서 그 옥좌에 앉는 장면이 서두에 묘사된다. 그 심판주는 '사람의 아들', '인자'(人子)로 번역된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ho hyos tu anthropu; the Son of Man)이다.
이 호칭은 다니엘서 7장 13절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는 표현으로 최후의 심판 때에 오실 심판주로서 '사람의 아들'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사람의 아들'을 이러한 개념으로 사용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이 때에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제1차 수난 예고(마태16,21~26) 직후에 나온 것으로서, 예수님 자신은 비록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지만, 장차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모든 사람의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도입하는 매개체 구실을 한다.
이것은 최후 심판에 대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유사한데, 마태오 복음 26장 1~2절에 의하면 이 비유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기 3일 전에 행해진 이야기이며,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시지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실 것이고, 당신 자신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사랑을 베푼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드러낸다.
마태오 복음 25장 31절(ㄱ)에서 3인칭 소유격 단수 대명사 '아우투'(autu; his, him)가 두 번 쓰였다.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그의 영광으로,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천사들이'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인 자신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심판주의 엄격하고 공정한 권위를 한층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기법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광'에 해당하는 '독세'(dokse; glory)의 원형 '독사'(doksa)는 어떤 권세나 명예 따위를 소유할 자의 내부에서 발산되어 그 배후에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그 어떤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독사'(doksa)는 하느님께 속한 특성으로서, 성부 하느님에 의해서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은 세상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전우주적 구원자, 전우주적 심판주이시며 재판장의 자격으로 오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강생(육화)때 베들레헴 마굿간에 초라하게 오신 것과는 달리, 재림 때에는 전우주적인 심판주의 자격으로 위엄과 권세를 떨치시면서 오신다는 것인데, 그것이 '모든 천사가 함께 온다'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마태오 복음 25장 32절에는 '모든 민족들이' 주격이 되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여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 24장 31절에는 '천사들은 사람의 아들이 선택한 이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라고 나오는데, 여기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이 영광의 옥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사방 곳곳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 민족들'에 해당하는 '판타 타 에트네'(panta ta ethne; all the nations)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그리고 심판의 때에 재판장은 세상 가운데 서로 뒤섞여 살던 의인과 악인을 철저하고 확실하게 분리해 낼 것이다.
여기서 '가르다', '분별하다'는 의미로 번역된 단어 '아포리세이'(aphorisei; will separate)의 원형 '아포리조'(aphorizo)는 둘 사이에 경계를 지어 철저하게 분리하고 구별짓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이 동사가 미래 시제인 '아포리세이'(aphorisei; will separate)와 현제 시제 '아포리제이'(aphorizei; separates)로 각각 쓰였다.
현재 시제는 양과 염소를 구분짓고 따로 세우는 그 당시의 목축 관습을 묘사한 것이며, 미래 시제는 최후 심판의 날 재판장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팔레스티나에서는 양과 염소가 같은 들판에서 뒤섞여 풀을 뜯는데, 밤이 되면 양은 양의 우리에서, 염소는 염소의 우리에 각각 들어감으로써 두 무리 사이에는 양을 치는 목자에 의해서 철저한 분리가 이루어진다.
또한 본문의 양과 염소는 각각 의인과 악인을 대표하는 상징적 매체인데, 그 당시의 양과 염소는 각각의 무리에 들어감으로써 분리되었지만, 여기서는 재판장의 오른쪽과 왼쪽에 세위짐으로써 분리될 것으로 진술된다.
여기서 '자기 오른쪽'에 해당하는 '덱시온 아우투'(deksion autu; his right)는 '재판장의 오른편'을 의미한다. 또한 '덱시온'(deksion)의 원형 '덱시오스'(deksios)는 오른쪽(right)을 의미하나 반드시 장소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고대 희랍 세계에서는 명예롭거나 좋은 쪽을 오른 쪽이라고 했고, 플라톤이나 유대 랍비들의 서적에서는 구원이나 은총의 자리를 오른 쪽으로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도 영도자와 구원자로 하느님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사도5,31)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사도2,34~35).
이것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지니셨던 당신의 영광과 권세와 명예를 회복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양을 재판장의 오른쪽에 세울 것이라는 말씀은 의인으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가지신 영예로운 자리, 혹은 구원과 은총의 자리에 세우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34절의 '복을 받은 이들아'에 해당하는 '호이 율로게메노이'(hoi eulogemenoi; who are blessed)는 앞으로가 아니라 과거에 이미 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율로게메노이'(eulogemenoi)가 수동태 완료 분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인데, 이들이 복을 받은 시점은 이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으로 희생적인 사랑을 베푼 바로 그 시점이다.
동시에 마태오 복음 25장 41절의 '저주받은 이들아'에 해당하는 '호이 카테라메노이'(hoi kateramenoi; who are cursed)도 과거에 이미 저주를 받았다는 뜻이며, 저주받은 시점도 그들이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지 않았던 그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주님을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고 베풀지 않은 그 시점부터 이미 마음으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상태를 심판의 시점까지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여기서 '내 형제들인 이'에 해당하는 '투톤 톤 아델폰 무'(tuton ton adelphon mu;
these brothers of mine)는 '나의 이 형제들 중에'라는 뜻이다.
'내 형제들'에 대해서 '고난받는 모든 사람','주님의 제자들','주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로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지만, 세번째인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가장 작은 이들'로 번역된 '톤 엘라키스톤'(ton elachiston; of the least)에서 '엘라키스톤'(elachiston)의 원형 '엘라키스토스'(elachistos)는 '작은'이라는 뜻의 형용사 '미크로스'(mikros)의 최상급으로서 '가장 작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관사와 함께 복수형으로 쓰여서 일반 명사의 의미가 되었다.
여기서 '가장 작은 이들'이란 키가 작거나 나이가 어린 자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참으로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도 전혀 끌 수 없을 정도로 간과되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마태10,42; 18,6).
의인들은 '사람들이 자칫 소홀히 여겨 간과하기 쉬운 사람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그것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자비를 베푼 자들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고난받는 형제들을 동일시하신다.
이것이 마태오 복음 10장 40~42절에도 나타나는데,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가 곧 예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를 보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잠언 19장 17절에도 나타나 있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
주님께서는 고난받는 형제들이 당하는 그 고통을 같이 나누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 형제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머리이시고, 당신의 교회가 다름아닌 당신의 몸이기 때문이다(에페1,22.23)
따라서 지극히 작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푼 의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자비를 베푼 것과 같은 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하다’는 단어의 히브리 말 어원은 ‘따로 떼어 분리하다’에서 나왔는데, 어느 종교에서나 보통 거룩하다고 하면, 속됨과 철저하게 분리된 성스러움을 전제합니다. 물론 성경이 전하는 거룩함에도 분명 그러한 차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가 우리에게 계시로 전해 주려는 하느님의 모습은, 그 거룩하신 분이 우리 가까이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 것으로 삼으시어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귀한 손님을 맞으려고 집 안팎을 청소하고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기에 우리의 삶이 그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느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인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갈 때, 그 거룩함은 과연 어떻게 드러날까요? 옛날 바리사이들처럼 외적으로 옷자락 술을 길게 만들어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억누르지 않고 약한 이들을 보호해 주며 정의를 수호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함으로써, 내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임을 드러내야 한다고 오늘 독서 말씀은 강조합니다. 또한 “가장 작은 이들”을 예수님과 같이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따뜻이 맞아들이며, 그들에게 시중을 드는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의 기준은 이웃에게 얼마나 희사했는가가 아니라, 보잘것없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자들을 보살폈는가, 곧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평범하고 작은 이들에게 얼마나 친절하게 해 주었는가가 기준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