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화를 담아 주셨다
사랑도 이와 같아서 누구나 사랑하지만, 쉬운 만큼 금이 가기 쉽고 깨지기도 쉽습니다.
먼저 여러 레지오 단원 여러분께 처음으로 인사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편집실에서 온 원고 부탁을 받고 나서 저는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내 삶을 바꿔 준 한 말씀”이 저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서품식에서 새로 서품을 받는 신부님들이 주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에서 사제로서의 모토가 되는 성구를 보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주님 말씀 하나하나 모두가 제 삶을 이끌고 바꾸는 기적이니까요. 그렇지만 제목을 주셨으니 답을 내야지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서 하나 찾아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당신의 보화를 담아 주셨다.”(2코린 4,7)
이 뜻은 무엇입니까?
질그릇은 귀한 물건이 아닙니다. 금은이나 도자기 같이 빛이 나거나 비싼 물건이 아니라 투박하고 볼품없어서 막 쓰는 그릇. 단단하게 굽지 않아서 깨지기 쉽고 조금만 건드려도 금이 가고 모양도 없는 그릇이지요. 사랑도 이와 같아서 누구나 사랑하지만, 쉬운 만큼 금이 가기 쉽고 깨지기도 쉽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음도 그렇습니다. 부서지고 갈라지고 흩어지기 쉽지만 하느님은 우리 질그릇에 축복, 은총, 믿음, 사랑, 모두를 담아 주십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질그릇 속에 보화이십니다.
세례와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넘치는 보화를 담아주시지요. 우리는 그 보화를 잘 알아보지 못하고 흘리거나 쏟거나 또는 썩히기도 합니다.
“자랑, 시기, 교만하지 마라. 나는 질그릇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다만 주님이 주신 보화를 담아서 귀하게 쓰이려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이렇게 깨지기 쉽고 금이 가기 쉬운 질그릇 속에 주님의 보화를 담아서 나누고 봉사하고 배려하는 일,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제 생각에 바로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이 그런 질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주신 보화를 가장 많이 담아서 널리 전하고 퍼트리는 그릇이 바로 레지오 마리애 단체입니다.
레지오는 성모님의 군대입니다.
어떤 사람은 레지오가 기도하고 봉사하는 단체로 알고 있더군요. 보고서 내용에도 보면 모두 봉사이고 전교는 조금밖에 없습니다. 물론 기도와 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와 봉사는 다른 소공동체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레지오’는 라틴 말로 ‘군대’라는 뜻입니다. 전교하는 군대이지요. 그리고 ‘까떼나’는 ‘연결고리’이지요.
지금은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사목방향이 흐르고 있어서 레지오 마리애가 소공동체에 밀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만, 목적이 다릅니다. 레지오는 성모님의 군대이고 전교단체입니다. 질그릇 속에 주님이 보화를 담아 주셨으니 주님 뜻에 맞게 잘 써야 합니다.삶을 바꾼 한 마디에 대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지만 저와 레지오 마리애의 인연을 말씀 드릴까요?
모두들 저를 안동사람 두봉 주교라고 하지만, 저는 안동에 오기 전 대전 대흥동본당에서 10년 동안 본당 사목생활을 했습니다.
대전 대흥동본당에서 10년 동안 한 신부님(오기선 요셉) 밑에서 보좌신부 노릇을 했는데 그 때 당시 레지오는 없었습니다. 그때는 소공동체도 없었고 조직이라는 것이 없었지요. 저는 레지오 마리애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임신부님께 여러 번 건의했습니다만, 신부님은 허락을 하지 않으셨어요.
수차례 졸라대자, “그러면 알아서 해라. 그러나 나는 단체 필요성을 못 느끼니 협조는 않는다.”
그래서 처음으로 남녀 혼성반으로 약 15명을 모았는데, 그 때 첫 단장이 유현석이라고 유명한 정의감 있는 판사였습니다. 그때 본당에는 개신교에서 목사를 하다가 천주교에 입교해서 교리교사를 하고 있던 아주 박식하고 자존심이 강한 지 바오로라는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입교까지 하면서 천주교에 귀의한 그분은 나름대로 자존심이 대단해서 정성껏 예비자교리를 가르쳤는데 그 중 몇 사람이 그만 영세 전 ‘찰고’ 시험에서 떨어져 영세를 못 받았어요(그 때는 ‘찰고’ 시험을 통과해야 영세를 주었어요).
지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내가 잘 가르쳤는데 신부가 영세를 안 주어서 내가 무시당했다”고 그만 냉담을 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우리 ‘치명자의 모후’ 첫 모임, 첫 활동지시가 그분을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첫 활동보고를 들으신 본당신부님께서 “그런 돌대가리한테 헛수고마라” 하고는 “만일 그 사람이 다시 성당에 나오면 레지오를 적극 밀어주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후 주일미사에 지 할아버지가 성당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저는 주님이 우리 레지오라는 질그릇 속에 담아 주신 보화가 작용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신부님은 약속을 지키셔서 우리 쁘레시디움을 적극 도와주셨고, 본당에서 우리 레지오는 굉장한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우리는 다만 도구일 뿐입니다. 봉사와 기도를 하되 전교를 위한 것.
저는 여러분이 레지오라는 질그릇에 담긴 ‘주님이라는 보물’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데 쓰이는 못생기고 낮은 그릇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봉 레나도 주교, 전 안동교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