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창조한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입니다. 몸매를 가꾸거나 건강 때문에 체중을 줄이려는 이들에게는 조금 언짢게 들리겠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겁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물론 저울 위에 올라서면 불과 얼마 되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무거움이란 ‘사람의 소중함’의 무게입니다. 한 사람의 소중함은 우주의 무게만큼,아니 그보다도 더 무겁다 하지 않던가요! 거창한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압니다. 그래도 굳이 그 이유를 대자면, 우리 교회는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벗이기 때문에, 성령의 궁전이기 때문에 사람의 소중함의 무게는 세상 만물 그어느 것보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다한 것보다 무겁다고 믿습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처음부터 그 속이 꽉 들어찬 ‘알곡’인 셈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이 소중함의 무게를 감히 저울에 올려 놓고 달아보려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무게를 달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며,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며 ‘죄’입니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무게를 달고,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고 또 무게를 달고, 성이 다르다고 또 무게를 답니다. 어떤 것들은 사람이 일부러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저울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발명한 저울 가운데 하나가 ‘자유경쟁’입니다. 자유도 좋은 것이고, 경쟁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가 무제한을 의미하거나, 경쟁이 사생결단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한경쟁시대’라는 그럴듯한 말을 온 세상에 퍼뜨림으로써, 모든 이를 싸움터로 내몰고 있습니다. 한술 더떠서 사람의 소중함을 시장에 내다놓고 사고파는 그런 상품 정도로 만듭니다. 교육도 시장의 상품이고, 노동도 시장의 상품이고, 하다못해 땅도 시장의 상품이 됩니다. 비싼 값에 팔 수 있으려면 좋은 상품, 질 좋은 상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경쟁’이라 미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로 포장하여 아무도 거부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게 무제한의 사생결단의 투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그들은 ‘알곡’이라 하는데, 흔히 ‘경쟁력을 갖춘 사람’으로 칭송합니다. 그리고 이 무자비한 투쟁에서 쓰러진 사람을 그들은 ‘쭉정이’라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이라고 혀를 찹니다. 그렇게 사람의 소중함은 계량화되어 그 무게에 따라 일렬로 줄을 세웁니다. 그렇게 사람은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고, 예수님의 몫을 대신하려 합니다. 한참 뒤에 서 있는 사람을 쭉정이로 만들고, 자신들은 알곡 행세를 합니다. 물론 그들의 저울에 따르면, 오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조차 하찮고 어리석고 무능한 사람에 불과하겠지요. 태어난 출신 배경도 그다지 대단치 않고, 자란 환경이 귀족적인 것도 아니고, 더더욱 지도자들의 현명한 판단에 따라 십자가에서 조롱을 받으며 돌아가셨으니까요...
오늘 복음말씀은 그 예수님이(결코 쭉정이가 아니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요구합니다. 알곡과 쭉정이, 누가 알곡이고 누가 쭉정이입니까? 알곡이 되고 싶습니까? 알곡은 그들의 장단에 춤추지 않으며, 그 대신 예수님의 장단을 맞춥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신수동성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