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뢰헬(1525-1569, 네덜란드)은 16세기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며,
그의 두 아들 역시 화가이다.
그는 농촌생활을 자주 그려, ‘농부’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것은 그가 서민의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유럽 회화의 거장들 중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그가 그린 대부분의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는 주로 정겨운 풍경화를 배경으로 농민생활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박사의 경배>에는 풍경이 없다.
오직 사람만이 가득하다.
이 그림의 배경은 마태오복음 2장 9~11절이다.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런데 동방에서 본 별이 멈춘 곳은 왕궁이 아니었다.
그곳은 마구간이었다.
마구간 안에는 나귀 한 마리가 구유 앞에서 행복한 모습으로 서 있다.
아마 이 나귀는 평화의 임금이로 오시는 예수님을 이집트로 모실 것이다.
구유 앞의 나귀는 이사야서 1장 3절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작가는 하찮은 나귀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나귀와 구유를 등장시켰다.
나귀 앞에는 요셉이 있다.
그는 꿈에서 천사의 계시를 받았듯이 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요셉은 눈을 감고 무엇인가 듣고 있다.
요셉은 아마 베들레헴에서 큰 학살이 벌어질 것이니,
이집트로 피신하라는 말을 그에게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셉의 옆에는 기사와 군인들이 날카로운 창과 활을 들고 서 있다.
그림의 중심에는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한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왕 멜키오르,
인디아의 왕 발타사르,
아리비아의 왕 가스파르이다.
훗날 그들은 화가들의 손에 의해 백인과 황인과 흑인으로 그려졌고,
노년과 중년과 청년으로 그려졌다.
또 그들은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바친다.
여기에서 황금은 왕권을 의미하고,
유향은 신성을 의미하며,
몰약은 구원을 의미한다.
그런데 황금과 유향과 몰약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 재미있다.
노년의 동방박사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홀과 모자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예수님께 경배하며 황금으로 가득찬 그릇을 봉헌하고 있다.
그런데 미소를 짓고 있는 아기 예수님은 황금을 피해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한다.
그분은 세상의 왕보다는 천상의 왕으로 오시길 바랐으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아기에게 손짓으로 말하고 있다.
“그냥 받아들이세요.” 라고.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중년의 동방박사는
허리를 반쯤 숙인 채 값비싼 몰약을 담은 황금 항아리를 봉헌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눈을 감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한 병사가 몰약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놀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두가 자고 있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몰약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병사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놀라 달아나고
빈 무덤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년의 동방박사는 그냥 서서 값진 보석들로 장식된 배 모양의 향로를 봉헌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곁에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향로를 바라보며 경탄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동방박사도 예수님을 보지 않고 우리를 보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대사제이신 예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드려야할 사람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여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하는 삶의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인가보다.
[출처] 동방박사의 경배 - 브뢰헬|작성자 그림 읽어주는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