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보다는 자비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기다릴 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떤 죄를 지었는지 생각하고 그 생각을 되뇌는 탓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시선이 죄를 향해 있기 때문이지요.
죄에는 어둠의 속성이 있기에 그 어둠을 계속해서 바라보면, 우리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이건 마치 물리법칙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을 담은 죄를 바라볼 때 빛을 잃어버리는 법칙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를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잘못을 세심히 살피다 보면, 그 과정에서 어느새
우리 마음이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해성사 때 자신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더 집중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는 숙명이지만, 그것만 바라보다가는 자칫 영적 장애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포자기와 무력함과 죄책감에 자기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사를 봐봤자 맨날 똑같은 죄만 고백하게 되고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며
고해성사 무용론(?)까지 말할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힘만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용서로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만이 그걸 가능하게 하죠.
그분의 용서는 목욕탕에서 때를 벗기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깨끗하게 산다고 해도 때가 쌓이기 때문에, 그것을 씻어내야 합니다.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어야죠.
'하느님의 목욕탕'은 엄청 편합니다.
우리가 가서 그분께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자세만 취하면, 알아서 때를 벗겨주시죠. 그
런데 아버지께서 등을 보여달라 하시는데 배만 내밀고 있으면 등은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선택권이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 권리를 무시하지 않으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깨끗하지 않은 등을 지닌 채 살아가겠죠.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물론, 더 심하게 더러워진 등이라도 다시 그분의 목욕탕에
가기만 하면 아주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엄청난 세신사, 최고의 때밀이(!)신 까닭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완벽하지 않게' 창조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한계가 많고 약하게 만드신 것이죠.
그 이유는, 그렇게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이기에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인간이 창조주와 하나가 될 때 완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성자 예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우리가 주인과 종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발전한다는 사실과 일치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계약이 만료되면 끊어지지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영원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기대야 합니다.
그 자비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며 자꾸 죄만 바라보면 금방 한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힘이 빠지고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비로소 아버지 하느님을 바라보게 되는 건
다들 비슷하게 해본 경험 같습니다.
이렇게 반복하다가도, 우리 모두 언젠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크게 깨달아
영적으로 한 단계를 도약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현우석 스테파노 신부 | 얘기 들어주는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