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聞 不如一行
오늘 복음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올바른 기도의 '실행'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실 기도의 의미와 중요성, 종류와 방법을 설명해 놓은 서적과 정보들은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百聞이 不如一行(백문이 불여일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에 관해 수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스스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에도 기도는 생소한 영성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인들 사이에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생활의 일부였습니다(마태 6,1-18 참조).
그런데 위선자들이 바치는 기도의 행태에서는 가식적이고 빈말을 되풀이하거나
말을 많이 해야 하는 등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기도가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기도는 주로 이른 새벽이나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시간대에,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한적한 곳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는 영적인
대화의 성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이러한 모습을 자주 눈여겨보다가
오늘 용기를 내어 스승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行)에 관해 묻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사실 하느님께 기도한다고는 하지만, 어느새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뒷전이고
청원의 내용이 앞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은 내 청원을 듣고 신속히 가부를 결정 해주는 해결사가 아니라
정감적인 '아버지'라는 점을 예수님께서는 먼저 상기시켜 주십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신뢰관계 속에서 청원과 청취가 오가고 자녀에게
더 유익한 것을 주고자 고심하는 부모의 마음도 이 기도 안에서 작용합니다.
그런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기도의 과정에는 자녀인 우리가 청하고, 찾고,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항구함이
뒷받침되어야 더 나은 기도의 결실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손님 대접을 위해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 양식을 청하는
이의 비유(루카 11,5-8 참조)를 들어 이를 설명해 주십니다.
평소의 '우정'만으로 자신이 청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원룸 형태의 집안에서 온 식구들이 깊은 잠을 자는 시각에 평소의 친분만으로
친구는 그에게 양식을 내어줄 리 만무합니다.
가족의 수면을 방해하면서까지 부산스럽게 일어나 양식이 보관된 곳을
뒤적여야 하고, 이미 닫아둔 문을 번거롭게 다시 열어 언짢은 마음으로 양식을
건네야 하는 여러 불편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청하는 이는 거절을 이미 예상하고, 또 결례를 무릅쓰고 친구에게
끊임없이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는 '청 하여라 ?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루카 11,9-10 참조)를 충실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몇 마디의 핀잔으로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끈질긴 간청에 친구는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며 마침내 그에게 필요한 것을 건네줍니다.
달랑 빵 세 개만 주었겠습니까?
이 밤중에 다시 찾아와 더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배 이상의 빵과 포도주,
손님 대접에 필요한 그 외의 양식도 함께 챙겨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까?
하루 동안 나에게 일어났던 여러 소소한 사건과 감정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의중을 헤아리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은 아랑곳없이 일방적으로 하소연만 하거나 한 두 번의 시도로
쉽게 그치고 마는 단발성의 기도입니까?
청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리는 이 놀라운 기도의 결실에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무한한 신뢰가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현창 (베드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