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성"에 나타난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존재'와 '현존 양식'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의식 속에
늘 인지되어 왔었다.
또한 하느님이 '존재하느냐' '않느냐'의 문제는 하느님의 존재 유무를 둘러싼
회의로부터 출발했다기보다 하느님이 현실 세계 안에서 그 현존을 느낄 수
없는 침묵으로부터 그 무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존재'와 '현존 양식의 문제'는 "야훼는 숨어 계시다"는
명제를 잘 해명하는데 있다.
지성적인 문제를 지나서 실존적인 현실을 앞에 놓고 '숨는다'는 뜻을
해명하는 것이 선무(先務)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이 물음이 충실하게 입증되지 않는 한 신앙인들의 영성생활은 무의미한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은 '무한한 활동적인 현존'과 '객관적인 현존' 양식으로
나타난다.
무한자이신 하느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유지시키기 위해 피조물 안에
계속적인 창조라는 하느님의 활동이 중지된다면 모든 피조물은 무(無)로
떨어지고 만다.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라고 성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활동적인 능력에 대해 어디든지 계시고, 본질적인 실제의
현존의 종속명 아래 지칭되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손으로 진흙을 빚어 만든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당신의 모사에 따라 창조된 존재이다.
신성의 참여인 이 은혜는 '무한한 현존에 의해 가장 높고 현실화된 작품'이다.
그러나 이 무한한 현존은 우리 내면적 하느님과의 우리 교제들을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객관적 현존이라고 부르는 다른 현존 방법에 힘을 빌려야만 한다.
'객관적 현존'이란 무한한 현존에 의해 하느님은 영혼에게 자신의 활동으로
자신의 현존과 본성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어 영혼이 성삼위적 생활에 참여토록
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 참여를 가능케 하는 것을 예수의 성녀 테레사는 '우정의 만남'인 기도라고
정의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이성이 바로 영혼'이며 영혼의 성에
들어가는 문을 기도라 하였다.
기도는 하느님과 영혼의 우정의 거래로 "영혼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을 위한 영혼의 초자연적 사랑이라는 이중운동의 열매이다."
예수의 성녀 테레사는 이 이중적 운동에 대한 발전 안에 두 가지 진행과정을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진행과정에서 하느님은 일반적인 도움이나 혹은 영혼에게 허락된
일상의 은혜에 의해 사랑을 표현하신다.
이 단계에서는 이니시어티브와 활동의 주역을 하는 것은 인간편이다.
하느님의 도움에 적극 응답하는 크리스찬의 삶의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단계에 해당한다.
두 번째 진행과정 안에서 하느님께서 더욱 더 능력 있는 특별한 도움에 의해
묵상기도에 개입하면서 점진적으로 영혼에 개입하시어 점차적으로 당신께로
영혼을 이끌어 조금씩 영혼은 수동성에 이르게 된다.
영혼의 성은 하느님과 영혼의 이 이중 운동을 7궁방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고
영혼의 가장 중심부에 하느님이 객관적 현존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예수의 성녀 테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영혼이 하느님과의 일치의 과정을
초심자들의 제일보로부터 신비적 일치의 최고봉까지 영적인 길의 완벽한
안내자로서 이끌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구름', 즉 '무지의 구름'이
끼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무한한 현존에 의해 가장 높고 현실화된 작품' 자체로는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초자연적 은총인 '객관적 현존'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일치할 때 영혼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영혼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된다.
영성생활은 점진적인 내재성으로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를 위한 삶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을 찾기 위해 영혼은 자기가 있는
위치를 알고 하느님을 만날 때까지 점차적으로 내재화해야 되는데
이 내재화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 영혼의 성이다.
영혼의 성에서 예수의 성녀 테레사는 하느님과 깊은 일치 즉 영적 결혼을
이루는 것이 인간의 목표이며 이상임을 영성생활의 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장석훈 베르나르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