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성찰과 고해성사

2015. 12. 2. 오전 6: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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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성찰과 고해성사

 

 

나는 고해성사 또는 화해성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고 싶다. 화해라는 말은(이렇게 말하면 오늘날 이단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사로서는 썩 좋은 명칭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 까닭은 우리가 늘 하느님과 화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과 같은 종류의 영성서적을 읽고 싶어하는 열심한 사람들에게 그 말이 썩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은 살아가면서 그리 대단한 죄를 짓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말뜻대로라면 화해해야 할 일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화해성사는 우리와 하느님, 우리와 죄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나는 죄를 악의가 아니라 질병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에는 두 가지 종류의 죄가 있다. 우리가 적의나 악의를 품고 있다면 분명 화해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한다. 그러나 열심한 사람들한테는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렇다면 살면서 죄가 질병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어떤가? 로마서 7장에서는 죄의 유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이런 죄의 유형은 열심한 사람들, 때로는 거룩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퍽 흔하게 볼 수 있다. 야고보 성인은 올바른 사람도 하루에 일곱 번이나 죄를 짓는다고 했다. 올바른 사람도 말이다. 그러니 연약함이라는 죄, 질병으로서의 죄는 비록 신심 깊은 열심한 사람들의 삶이라 해도 흔한 것이다. 우리가 아프다면 화해가 아니라 치유가 필요하다. 이러한 까닭에 죄를 두 가지로 보아야 한다면 고해성사나 화해성사도 두 가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악의로 저지른 죄라면 고해성사로 용서를 받아야 하지만 질병이라면 고해성사를 통해 치유를 받아야 한다. 자, 성사에 대한 이런 생각이 옳다면(그렇다고 여기서 나를 지지해 달라고 어떤 큰 권위에 호소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물어오는 수많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먼저, 왜 나는 늘 똑같은 죄를 저지르면서 거듭거듭 고해성사를 보러 가야 하는가? 물론 명백히 악의로 죄를 지었다면 이러한 비판이 합당하다. 그것은 참으로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나쁜 뜻으로 지은 똑같은 죄를 가지고 주일마다 고해성사를 본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진실성에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만일 이번 주에 정말 나쁜 뜻을 가지고 죄를 지어 잘못했다고 고백했는데 다음 주일에 다시 똑같은 죄를 지었다면 그건 매우 이상한 것으로, 자신의 진실성을 의심해 봐야 한다. 그러나 내가 질병이라고 말한 죄, 곧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죄의 유형인, 나는 내가 바라는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게 된다면, 그러한 경우는 언제든지 고해소로 다시 가는 것이 분별 있는 처사일 것이다. 의사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만일 내가 어딘가 아프다면 믿을 수 있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병이 나을 때까지 그를 찾아갈 것이다. 한번 갔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환자는 의사에게 "제가 지난 주일에 왔는데 이번 주일에도 여전히 아프네요. 다시 올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내가 그 의사를 믿는다면 병이 나을 때까지 기꺼이 계속해서 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벳자타 못가에 누워 있던 38년된 중풍병자가 37년이 되었을 때 못가에 나오는 것을 그만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37년째 되었을 때 "이만하면 충분해. 37년 동안이나 여기에 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라고 말했다면, 주님이 오셨을 때 그는 그 못가에 나와 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주님을 만나지도, 병을 고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고쳐주러 오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기꺼이 그곳에 나왔고 마침내 치유를 받았다. 요약하면 양심성찰이나 화해성사나 똑같이 하느님이 어떻게 말씀하셨고 나는 거기에 어떻게 응답했는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응답을 하지못했다면 질병 때문이므로 자신을 아주 참을성 있게 대해야 하며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악의로 죄를 저질렀다는 의미의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되지만 내가 바라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생각하며 깊이 겸손해야 하고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실 수 있는 주님을 더욱더 의지해야 한다. 이렇게 양심성찰과 성사가 통합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악행이 죄가 아니라 질병일 경우, 양심성찰을 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좋다고 늘 말한다. 다시 말해 마지막 성사를 본 이후 어떤 상황에서 하느님과 가장 잘 만났는지를 고백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 이렇게 고백했다고 치자. "고해한지 3주일 됐습니다. 그동안 굉장히 힘들었고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그런 나를 격려해 주는 친구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민감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고백이다. 내 생각엔 치유받아야 할 죄 목록을 작성하고 고백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소위 '세탁물 목록', 곧 상세한 빨래감 목록을 적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좋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방법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고, 나라면 그것은 정말 필요치 않은 일이라고 말해 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맹장염에 걸려 병원에 갔다고 하자. 그러면 의사가 달려와 당신을 수술대에 눕혀놓고 수술을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마취를 시작하기 전에 당신이 "그나저나 의사 선생님, 이것 말고도 저한테는 발톱이 파고드는 증상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맹장을 떼어내면서 그것도 봐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멍청한 일인가. 물론 의사가 발톱을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당신의 목숨을 구하는 일일 것이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특별히 치유가 필요한 주된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치유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이 성사를 통해 특별히 여기, 그분께 응답할 필요를 느끼는 여기에 집중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아주 건전한 실천이라고 본다.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토머스 H. 그린 지음 / 한정옥 옮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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