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11호/선교다큐멘트-새 천년기와 종교간 만남의 부상

2002. 1. 4. 오전 11:35:27

글자

선교 다큐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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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기와

종교간 만남의 부상

마르첼로 자고 대주교

 

  종교간 만남의 부상은 세계화와 종교다원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세계의 사회 종교적 상황의 일부분이다. 20세기의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 종교간 대화가 아시아를 시작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가오는 천년기에는 세계화와 종교다원주의의 경향이 증대될 것이며, 이러한 경향은 다양한 종교간의 만남을 촉진하는 동시에 충돌을 불러올 수도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종교간 만남을 불가피하게 하는 세계화와 다원주의의 배경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1-2항). 세계화와 다원주의가 파괴적인 충돌이 아니라 긍정적인 만남이 되려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종교간 대화를 위한 전망과 태도, 활동들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3-4항).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종교간 대화가 함축하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 복음 선포에 대한 선교 명령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다(5-6항). 제삼천년기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교 선교는 도전인 동시에 기회이기도한 대화와 선포에 대하여 스스로 평가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1. 세계화와 다원주의

 

  1.1. 전세계에 걸쳐 세계화는 경제와 정치뿐 아니라 문화와 종교 등 모든 분야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세계화는 사람들과 종교 전통들 간에 상호 이해와 교류를 촉진하며,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하여 쉽게 세계 문화를 탄생시킨다. 세계화는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정치 분야에서도 새롭고 균등한 기준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반발하여 여러 인종 집단들이 문화적 정체성을 추구하고 있다. 본능적으로 그들은 살아 남아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현상, 곧 종종 국지전으로 불거지는 인종 갈등과 북남미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와 같이 억압당해 온 문화들의 재부상을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1989년과 1992년 사이에 일어난 82건의 충돌 가운데 72건이 다양한 인종 집단이나 종교 문제들과 관련된 내부적 성격의 충돌이었다. 그 이후 이러한 현상은 거의 모든 곳에서 증가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제연합 유네스코 사무국은 1999년 2월에 “건설적인 다원주의를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국제 회의를 개최하였다.

  

  1.2. 종교 다원주의는 세계화된 현대 세계의 주된 추세 가운데 하나이며, 서방 국가들과 대다수 남반구 국가들에서는 이미 하나의 사회적 현실로 자리잡았다. 이슬람 국가들의 경우는 다원주의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그것의 표출을 반대하므로 적어도 구조적 표면적 차원에서는 예외인 듯하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그 명백한 경우인데, 그곳에 이주해 사는 60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절대 표현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같은 논리에 따라 점점 많은 수의 이슬람 국가들이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고 있으며, 소수민들을 주변으로 내몰고 있다.

  사람과 문화, 종교를 한곳으로 모으는 이민과 온갖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다원주의를 촉진하고 있다. 대종교들과 큰 교회들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매우 제한된 호소력을 가진 듯 보이던 종교 전통들과 이전에는 아주 먼 다른 시기에 속해 있는 것 같았던 문화들이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켈트족이나 골족의 종교와 같이 이미 사라진 종교들조차도 재부상하고 있다. 특히 도시에서는 과거 시대의 아프리카 전통 종교들의 수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실제로 아메리카로 끌려온 흑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다양한 형태의 부두교와 같이 금지된 종교 형태들이 부활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널리 보급되어 있는 뉴에이지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종교혼합주의도 나타나고 있다. 기원이 각기 다른 개인들이 스스로를 특정 종교, 교회, 운동의 창시자라고 주장하며 때로는 엄청난 금전적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종교적 규제의 철폐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말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세계화된 자유주의 세계에서 우리는 때때로 단편화된 종교다원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3.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원주의는 도전이자 기회이다. 이러한 도전과 기회는 그들 자신의 존재, 사명,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 도전은 흔히 대립적으로 보이며, 해결되거나 상쇄되어야 할 긴장 상황을 야기하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선포와 대화, 정체성과 개방성, 토착화와 혼합주의, 자율과 인권, 자유와 상호주의 사이의 긴장 같은 것을 상기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세계화와 종교다원주의로 야기되는 이러한 긴장들을 진정한 인간학적 신학적 가치들로 지혜롭고 균형 있게 해결한다면 그러한 긴장들은 오히려 유익한 것이 될 것이다.

  다원주의 또는 다원주의의 위협은 거의 본능적으로 상대주의 아니면 근본주의라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로 폭넓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대주의는 인간과 종교 또는 불가지론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면서 모든 신앙 고백과 모든 종교를 같은 선상에 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근본주의는 자기 종교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과 그것의 정체성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기 폐쇄적이 되거나 자기 종교가 담고 있는 가치 속에 갇혀 버린다. 이러한 반응들은 본능적이어서 어떤 나라들에서는 대중 운동이나 때로는 정치 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다수가 인정한다면 모든 것이 평등한 가치를 갖는 상대적 자유주의를 지향한다. 전제주의 국가들, 특히 종교적 성향의 전제주의 국가들은 많은 아랍 국가들이 그러하듯 사실상 근본주의 쪽으로 기울어 있다.

  다원주의 상황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개방성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주장 사이에 긴장을 조성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태도 사이에 올바른 균형만 유지된다면 둘 모두 유익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상대주의나 근본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사실상 다원주의 환경에서 살아가려면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필요하다.

긴장이 유발되는 또 다른 영역은 자율성 또는 인권 존중에 대한 추구이다. 터키는, 자국 내에 있는 터키인들에 대하여 허용하고 장려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무슬림과 결혼하여 터키에 사는 독일 여성들에게도 종교적 도움을 주도록 요구하고 있는 독일에 대하여 그러한 종교적 상호주의를 거부하면서 자신들은 종교적 자율성을 호소하고 있다. 중국도 교황청과 중국 가톨릭 교회의 관계를 허용하기를 거부하면서 유사한 자율성을 요구하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자국 내에서 무슬림이 아닌 어떠한 형태의 종교적 표현도 금지하고 있다. 반면,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나라들은 보편적 인권이 경제 문제와 같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문제들에 불이익을 주지 않는 한 보편적 인권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흔히 인권 왕국이라 주장하는 나라들의 경우에 그러하다. 종교 자유와 국제 상호주의의 개념 자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된다. 정치적 또는 종교적으로 통제된 조직체로서 자신을 가두어 두고 있는 국가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종교나 운동에 대한 억압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국가의 자율권을 호소한다. 모든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자유와 모든 인간의 평등은 권리의 상호주의와 그에 따른 정책을 요구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대화와 선포 사이의 긴장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개방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대화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유일한 대외 활동으로 삼을 만큼 대화에 우선권을 두는 반면, 자기 신앙의 분명한 정체성과 우월성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선포를 절대적 가치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다. 후자의 이러한 경향은 특히 이슬람 국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전자는 북아프리카나 인도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대화와 선포라는 두 가지 활동이 균형을 이룰 때에만 긴장이 해결될 수 있다.

적응 과정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모든 형태의 종교를 상대화하려는 사람들에게서 그것은 혼합주의의 형태를 띠는 반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 적응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토착화의 노력으로 나타난다.

 

  2. 만남과 충돌

 

  2.1. 같은 지역 안에 서로 다른 종교 전통들이 현존하고 그 전통들이 서로 접촉하면서 신앙이 다른 사람들간에 만남과 때로는 충돌이 생기기 쉬워졌다. 이러한 만남들의 동기에는 보통 사회적·문화적·정치적·경제적 동기와 같은 다른 동기들이 섞여 있다. 이러한 만남들의 긍정적 측면은 종교간 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세계 대종교들의 발생지인 아시아 국가들에서 대화는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의 배경에서 이루어져 왔다. 대화는 이해와 그리스도교 증언, 토착화의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가톨릭에서 종교간 대화의 개념이 나타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동안이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온갖 문화와 종교적 배경을 가진 전세계의 주교들이 한 자리에 모이자 신학적 실천적 차원에서 창조적 힘이 증대되었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은 원래 유다인들만을 다루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슬람 지역 주교들의 존재는 공의회에 이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였고, 아시아 주교들은 위대한 동양 종교들에 대한 화제를, 아프리카 주교들은 전통 종교들에 대한 화제를 끌어왔다. 종교간 대화의 개념을 탄생시킨 것은 바로 “민감한 다원주의”였다.

그 이후로, 대화에 대한 개념과 경험이 풍부해졌고 다양해졌다. 그러자 비그리스도교 사무국은 1984년에 창설 20주년을 기념하는 문서를 발표하였다. 그 문서는 네 가지 형태의 대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곧, 삶의 대화, 활동의 대화, 전문가들의 대화, 종교적 경험의 대화이다.1) 다른 형태의 대화의 중요성은 그 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25주년을 기념하여 1991년에 발표된 문서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더욱 최근의 문서는 종교간대화평의회와 인류복음화성이 공동으로 발표한 것으로서, 인간 증진을 통한 대화, 모든 형태의 인간적 만남이 전체로 합쳐질 수 있는 문화를 통한 대화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2)

현대 세계에서 이해와 대화의 실천은 다른 시대의 선교 역사에서 사용되던 방법들과는 달라 보인다. 예를 들면, 인도나 중국의 예수회 회원들, 16세기와 17세기에 멕시코에서 활동한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기울인 노력들은 다른 목적과 다른 전망에 기초한 것이었다. 당시에 그들은 문화를 긍정적 또는 중립적으로 받아들였던 반면에, 종교는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 문화들의 일부 측면들은 받아들이거나 취할 수 있었지만, 종교의 측면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의 목적은 복음화를 위하여 문화적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었고, 그 방법은 적응이었다. 반대로, 오늘날 대화는 다른 종교들 안에 내재한 구원의 차원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상호간에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종교들의 긍정적 측면에 기초하고 있다.

  

  2.2. 20세기 후반에, 평화적 만남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종교를 구실로 하거나 종교적 이유가 내포된 충돌도 여러 번 있었다. 예를 들면, 60년대에 스리랑카에서는 불교도들의 반대로 학교와 병원 등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70년대와 80년대에는 대다수 아랍 국가에서 무슬림들의 비타협적 태도가 증대하였다. 레바논과 중동에서 일어난 전쟁이 이를 반영한다. 90년대 초에는 발칸 반도와 중앙 아시아에서 인종적 종교적 갈등이 폭발하였다. 90년대 후반에는 인도나 인도네시아와 같이 전통적으로 관용적이었던 국가들에서 긴장이 증대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돌과 긴장이 증대되어 왔다. 폭력과 종교적 박해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무신론은 20세기 후반 첫 몇 십 년 동안 절정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종교적 의미가 증대하고 있다. 이슬람은 차별적인 법과 전파 방법 때문에 비난받고 있다. 이슬람 영토 내에서는 공민권의 평등을 보장받지 못하며, 다른 종교의 실천과 증언도 방해받고 있다. 개종은 허용되지 않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사형이나 시민권 박탈로 형벌을 가한다. 그러면서 그들 자신은 다른 곳에서 학교와 이슬람 사원을 짓는 데 재정을 지원하고, 그러한 재정 지원을 개종의 조건으로 삼으면서 이슬람의 전파를 촉진하고 있다. 유일한 도전은 아니지만 이슬람은 미래의 종교적 정치적 관계에서 가장 큰 도전이다.

대화만이 영구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실천 방법이다. 정복이든 징벌이든 성전(聖戰)은 복음의 눈으로 볼 때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폭력적 대립은 결코 안정적 결과를 가져다 준 적이 없었고, 인권을 존중해 준 적도 없었다. 역사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면, 해상에 들끓던 무슬림의 공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십자군 전쟁이나 무슬림 지하드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이러한 사건들의 부정적 측면은 오늘날까지도 상호 관계를 해치고 있다. 해결책은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동시에 고려하여야 하는 대화를 통하여 발견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기쁨을 발견하고, 자신의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을 모든 차원에서 변화시켜 줄 그리스도 안의 새 삶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와 국가들은 경제적 이익보다 인권을 우위에 두며, 국가 간에 상호주의를 요구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대화를 증진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발전할 것이다. 그러한 대화는 모든 사회적 종교적 차원에서 촉진되어야 할 적절한 교육을 통하여 증진되어야 한다.

 

  3. 부상하는 종교간 만남

  

  3.1. 종교간 만남은 다원주의 세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만남은 계획될 수도 있고 묵인될 수도 있으며, 우호적일 수도 있고 적대적일 수도 있다. 또한 지리적 근접성, 활동, 사회적 나눔, 매체의 반응에 좌우될 수도 있다. 종교적 요소는 본성상 수면으로 떠오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막연하게 괄호 안에 묶어둘 수 없다. 따라서 종교적 요소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만남 속에 통합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관계 자체가 깨어져 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이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종교적 성실성을 괄호 안에 묶어 두려던 미국의 실험은 미국 사회가 그리스도교 문화, 주로 프로테스탄트 문화의 압도적 지배를 받고 있던 과거에는 가능했었다. 그러나 지극히 다양하고 광범위한 다원주의와 자신의 정체성을 증진시키려는 개인의 본능이 종교 속에 반영되어 있는 오늘날, 이전의 방법은 근본적으로는 긍정적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적합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만남에서는 종교적 차원이 인정되어야 하며, 그러한 만남들은 종교간 대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최근 몇 년 동안의 경험은 미래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리켜 준다.

  3.2. 지난 수년간의 만남은 대화를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가는 도구가 되어 왔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든 밖에서든 우리는 만남을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한 방법으로 여기고 실천할 수 있다. 만남은 또한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 단체들과 실천하여야 할 구체적인 활동으로 볼 수도 있다. 만남은 단순한 종교간 대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 신자들간의 상호 이해와 풍요를 증진시키는 모든 형태의 활동이다.

 

  공존과 삶의 대화

 

  3.3. 대화에는 먼저 삶의 대화와 평화 공존의 대화가 있다. 지리적 근접성은 좋은 이웃 관계, 때로는 협력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고 또 발전시켜야 한다. 종교나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피하기 위하여 갖은 애를 쓰는 일부 도시들의 경우와 반대로, 종교나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적극적인 공존의 길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계속해서 피해 옮겨 다닐 수는 없다. 분열의 벽이 세워지고 게토가 형성되는 곳에는 증오가 자라나고, 머잖아 팽팽한 긴장과 함께 전쟁이 발발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종교 집단들이 서로 갈라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상황은 평화를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다.

긴장과 대립, 박해의 와중에도 대화의 필요성은 명백해진다. 특정한 사고방식과 편견의 결과인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도 주교들은 종교적 정치적 흐름을 총망라한 국가적 토론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초대장을 보냈다. 주제는 현 위기의 핵심적 사항인 개종이다. 이 주제는 사실들을 평가하고 명확히 하며, 전망을 비교하고 수정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3.4. 이러한 종교간 공존은 마을과 도시 또는 국가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지구촌이 된 전세계에 걸쳐 촉진되어야 한다. 종교 상호주의는 이러한 식으로 증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무슬림의 권리를 서방에서 인정해 준다면, 그에 따라 이슬람 국가들도 그리스도인의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 집단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증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불의를 외면하게 되면 미래에 사회-종교적 충돌의 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미국과 서방의 중요한 동맹국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로마를 비롯하여 모든 나라 안의 이슬람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지지해 주지만 자국 영토 안에서는 최소한의 종교적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서방 국가들은 인간 기본권의 이름으로 상호주의를 요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종교적 양상을 도마 위에 올려놓지 않으면, 서방 세계는 자기 발을 스스로 찍게 될 것이다.

 

  협력의 대화

 

  3.5. 협력의 대화는 공존의 대화보다 더 많은 창의성을 요구한다. 그것은 다른 차원에서 사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협력할 수단을 기대한다. 교육, 보건, 농업, 생산, 윤리적 사회적 도덕적 가치, 공중 질서 등 협력할 분야는 많이 있다. 개인적 경험을 말한다면, 필자는 불교와 그리스도교 학교들에서 도덕적 가치를 가르치는 일, 인간 증진 활동에서 종교적 동기를 찾는 일, 불교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있는 명상법을 비교하고 증진하는 일 등의 활동에 참여해 왔다.

1998년 11월에 인도 주교들이 바하이교도,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자이나교도, 이슬람교도, 시크교도, 조로아스터교도 들에게 인도의 새로운 종교간 대화 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모임에 참여하도록 초대한 것도 같은 동기에서였다. 모임의 참가자들은 “모든 종교의 주된 관심은 정의 증진, 인권 수호, 환경 보전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결의안에서 문제가 되는 애매한 측면은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강압적인 방법이 사용되는 개종과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인 개종 사이에 이론적 실천적으로 뚜렷한 구분이 이루어져야 한다.

삶의 대화와 협력의 대화는 종교적 차원을 간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 차원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모든 종교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을 길러 주는 고유한 능력이 있으며, 이러한 능력은 개발되어야 한다. 그러한 능력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면 결국은 긴장, 대립,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난 60년대에 제3세계 국가들의 개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종교적 차원, 특히 그러한 노력을 지지해 주었어야 할 종교적 동기를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호 지식의 대화

  3.6. 서로 다른 종교 전통에 속한 사람들이나 집단들과 이웃으로서 우정을 맺고 사회적 협력을 하려면 종교적 차원에서도 서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사실 종교는 더욱 깊고 더욱 확고한 가치와 동기를 전해 준다. 이러한 가치와 동기들을 인식하고 촉진할 수 있는 길은 서로에 대한 지식이다. 지식은 그 정도가 다양하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종교에서 비롯된 축제와 사회적 관습에 대한 지식에서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종교적 신념이나 신학, 역사로 넘어갈 수 있다. 이어서 신학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의 대화 단계로 넘어갈 수 있으며, 종교의 핵심인 숭고한 관조 체험으로 들어감으로써 정점에 이를 수 있다. 모든 지식은 다른 사람에 대한, 그 사람에게 소중한 것에 대한, 그 사람의 종교에 대한 공감을 필요로 한다.

  모든 지식은 다른 집단이나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를 필요로 한다. 경전들은 다른 전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과거에 대개의 서양인들에 의한 불교 연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종교를 왜곡할 수도 있다. 필자는 그러한 일이 지금도 일부 종교 다원주의 신학 연구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고 방식에 따라 다른 전통들을 해석하는 것이지, 그 종교가 실천되는 모습 그대로 그 종교를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들간에 또 교회들간에, 완전하게 표현된 삶의 경험으로 열린 신학적 대화가 촉진되어야 한다.

  일부 전통들은‘신학적’대화를 거부하는 듯하다.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믿는 은밀한 비밀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거나(전통 종교들), 진리의 소유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확신하거나(이슬람), 대화가 신앙을 약화시킬 것을 두려워하기(완전주의자)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개방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개방은 서서히 준비되고 증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경험의 대화

  3.7. 종교적 경험의 대화는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종교는 교리 공식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내적인 발전이며 경험이다. 다원주의 세계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접하게 되며, 출생이라든가 결혼, 죽음, 사회- 종교적 축제와 같은 인간 생활의 여러 사건과 관련된 타인의 경험들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한 동참은 종교의 핵심 자체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기도나 명상과 같은 더욱 내밀한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러한 경험들의 형태와 내용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경험들에 동참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 영역은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공식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이제 여정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1986년 아시시에서 열린 교회 일치와 종교간 기도의 날, 1968년부터 일본의 사찰과 서방의 그리스도교 수도원에서 정기적으로 열린 그리스도교 수사들과 불교 스님들의 만남, 인도에서 열리는 경험 차원의 종교간 세미나, 아슈람이나 명상 센터와 같은 종교간 중심지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만남은 민감할 뿐더러 때로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각자의 신앙을 시험으로써 그 신앙의 정체성이 흔들리거나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종교의 정체성을 존중함으로써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고, 삶의 신앙을 서로 진실하게 증언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신의 새 삶을 다른 이들에게 증언하고, 그 삶을 하느님께, 또 다른 사람들의 자유에 맡겨 그 문제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이는 다른 종교 신자들 편에서도 마찬가지이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은 하나의 도전이다.

 

  종교 지도자들과 전문가들 간의 대화

  3.8. 만남에는 다른 여러 형태가 있다. 서로 다른 종교 지도자들 간의 대화는 각자의 공동체에 긍정적인 관계를 증진시키는 본보기로서 상징적 중요성을 띤다. 종교 지도자들은 공동체 내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협력 형태의 길을 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서로 다른 종교의 전문가들간의 신학적 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지식을 심화시킬 수 있게 한다. 그러한 대화는 서로를 일치시켜 주는 것과 서로를 구별짓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 준다. 그것은 또한 협력과 토착화가 가능한 길을 가르쳐 준다.

 

  내적 대화

  3.9. 내적 대화는 개인적 차원에서든 공동체적 차원에서든 그리스도교의 요구와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뿌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혼합주의를 피하여 진정한 토착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적 대화가 필요하다. 신앙의 빛을 받지 않은 문화권 출신이거나 그러한 문화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상황을 평가하고, 그리스도교의 요구와 자신이 놓인 환경 또는 조상이 남긴 유산 사이에 대화의 길을 터야 한다. 우리 안에는 흔히 다양하고 대립되는 가치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한 가치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교화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혼합주의를 극복하고,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받아들이고 사회 종교적 가치들을 변화시키게 될 토착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4. 대화의 동기들

  4.1. 대화의 동기들은 인간적이고 종교적이다. 개인과 집단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성장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특히 그들을 구성하는 긍정적인 것들에 대하여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고 협력한다. 이는 서로에게 문을 열고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일반적으로, 가치들은 종교적 견해와 실천에 중심을 둔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존중과 또 그 종교의 신봉자들과 나누는 대화에 대한 존중은 세계화된 다원주의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모든 종교에는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게 문을 열도록 도와 주는 가치들이 있으며, 그러한 가치들은 종교간 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모든 종교인은 공동선과 사회의 평화를 증진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은 모든 사람, 특히 다른 종교인들과 협력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종교 기관들은 자기네 신자들의 참여를 금지하거나 촉진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책임을 더욱 크게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종교간 대화는 모든 신앙인들, 특히 그 지도자들에게는 중요한 책임이 될 수 있다.

  

  4.2.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은 기준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으며, 백인대장의 믿음(마태 8,5-13 참조)과 가나안 여자의 믿음(마태 15,21-28 참조)을 보시고 그러하셨던 것처럼 비유다인의 믿음을 존중하시고 높이 평가하심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과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우선되는 요소는 존중, 경청, 격려, 대화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종교 행위를 형식화하고 유형화하여 그것의 본성과 진정성을 없애 버린 사람들을 강하게 비난하셨다. 복음사가들은 문답법과 대화법의 예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더욱 자세히 나타내고 있다.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요한 3 참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요한 4 참조), 예수님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대화(루가 24,13-33 참조)를 들 수 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탁에서 식사를 나누시는 장면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모습, 인간 생활의 기본 동작을 바탕으로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방법을 드러내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실 때, 특히 생명의 빵(요한 6 참조)과 관련된 더욱 중요한 대화를 나누실 때 질문 방식을 자주 사용하셨으며, 그것은 예수님께서 대화를 통해 제자들과 맺으신 관계를 설명해 준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이웃들과 관계를 맺을 때, 또 증언을 할 때 본보기로 사용되었다.

  

  4.3. 그 외에,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도 대화의 형태를 통해서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3년에 그의 첫 회칙 Ecclesiam Suam에서 이를 잘 나타내 보여 준다. 하느님 안의 친교이며 상호 관계인 삼위일체는 대화의 형태로 구원 계획을 실현하였다.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응답은 대화로 나타내지고, 기도에서 정점에 이른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는 삼위일체의 내적 외적 관계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3)

  

  4.4. 대화에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인격과 가치뿐 아니라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며, 또 상대방은 성령의 구원 활동에 일치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인간 마음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활동을 수행하시며 불고 싶으신 대로 부시는 분이시다. 선교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잘 일깨워 주고 있다.

 “참된 대화는 교활한 계략이나 이기적 관심에서 나올 수 없고 고유한 원칙과 요구와 품위를 가진 활동이다. 그것은 어디서나 원하시는 대로 부시는 성령께서 인간에게 작용하신 모든 것에 대한 깊은 존경을 요구한다. 교회는 그래서 대화를 통하여 말씀의 씨앗과 모든 사람을 비추는 진리 자체의 빛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씨앗과 빛은 각 사람과 인류의 종교적 전통 안에 들어 있다. 대화는 희망과 사랑에 의지하여 성령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 다른 종교들은 교회에 좋은 도전이 된다. 곧, 교회가 그리스도의 현존과 성령의 작용의 표지를 인식하고 인정하도록, 그리고 교회가 자신의 본성을 깊이 성찰하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하여 유산으로 받은 계시의 충만함을 증언하도록 자극한다.”(56항)

 

  4.5. 선교 활동인 대화는 하느님 나라를 바탕으로 할 때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곧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실현으로, 종말의 단계에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 뜻이 완성되는 것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성사적 실현으로, 아직 그리스도교 신앙의 빛을 받지 못한 인류 안에 감춰진 실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며 도구인 교회 안에 이미 존재하기 시작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일하여야 하며, 종말에 가서야 온전히 실현될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과 복음의 가치에 열려 있다는 점에서 어느 면에서는 인류 역사 안에 현존한다고 할 수 있다.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교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은 이 주제에 한 장 전체를 할애하여, 하느님 나라를 특정한 형태 없이 모든 곳에 현존하는 실재와 동일시하여 선교에 대한 필요성을 감소시키는 일부 가톨릭 신학자들의 해석을 확대하고 통합하며 수정하고 있다.

 “사실상 교회는 하느님 나라에 봉사한다. 특히 회개로 초대하는 설교를 통하여 봉사한다. 설교는 개인과 인간 사회에 하느님의 도래를 알리는 교회의 첫째가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봉사이다. 종말론적 구원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생활을 통하여 이미 현세에서 시작된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 1,12).

  그리고 교회는 공동체를 만들고 개별 교회들을 세움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고 개인과 사회에 봉사하는 성숙한 신앙과 사랑으로 교회와 공동체를 이끌어 감으로써, 그리고 인간 제도들을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봉사한다. 또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고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복음적 가치들”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봉사한다. 사실, 사람들이  “복음적 가치들”을 실천하고 어디서나 원하시는 대로 작용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열려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 나라의 불완전한 실재는 교회의 경계를 넘어 온 인류 안에서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즉시 덧붙여야 할 사실은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현세적 차원이 교회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연결되지 않거나 종말론적 완성을 지향하지 않으면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와 복음의 비유가 상기시켜 주듯이 하느님 나라는 본질상 하느님의 선물이며 작업이므로, 교회는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에 봉사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요청하고 우리 안에 받아들여 성장시켜야 한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시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지배하실’(1고린 15, 24.28) 때까지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성장시킬 수 있도록 협력하여야 한다”(「교회의 선교 사명」 20항).

 

  5. 신학적 기준인 선포

 

  5.1.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과 모든 사람 안에서 또 모든 곳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구원 활동을 이용할 수 있는 신학적 전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전망을 가지는 데 요구되는 것은 객관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종교관이다.

그러므로 대화의 신학은 종교 신학과 연관되어 있다. 사실, 과거 50년 동안 종교의 가치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수없이 많았다. 그러한 평가들은 배타적, 포괄적, 다원주의적, 또는 교회 중심적, 그리스도 중심적, 신 중심적, 통치 중심적, 구원 중심적, 현실 중심적으로 분류되어 왔다.5) 이러한 신학들은 선교 실천에, 특히 선교 명령의 실현에 영향을 미쳐 왔다.

과거에 우리는 인간이 그리스도교 신앙 밖에서도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종교 자체의 구원 능력에 더 큰 중요성을 두고 있다. 두 가지 접근 모두 필요하다. 사실, 많은 사람이 대종교들 안에서 구원을 추구하며 살지만,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신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종교적 정체성을 규명하기가 힘든 단체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상황은 구원의 추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음이 분명하다.

 

  5.2. 신학적 입장을 평가할 때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요 교의뿐 아니라 교회의 관습, 생활, 사명을 고려하여야 한다. 필자는 이들 신학적 입장 가운데 상당수가 일반적으로 하느님 말씀에 거의 토대를 두고 있지 않으며, 하느님 말씀뿐 아니라 교도권을 포함한 종교 전통이나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의 핵심에도 충분한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흔히 선교 명령의 실천과 신학적 가치조차도 과소 평가되고 있다. 대화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두다 보니 선포의 권리와 의무가 부인되거나 최소화되고 있다. 이러한 신학들이 신앙의 주요 신조들을 보전하려고 애쓰면서도 실상은 그리스도께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선포라는 중심 의무를 그리스도인의 사명에서 제외시킨다면, 그러한 신학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5.3. 선교 명령의 유효한 가치를 중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교 명령은 선교 신학뿐 아니라 종교와 구원, 종교와 선교 활동의 관계를 밝혀 주는 참 신학의 주된 기준이 되어야 한다. 증언이며 선포인 선교는 그리스도의 새로움과 그분께서 전해 주시는 삶의 새로움을 실천하고 증언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재 자체가 지닌 특성이다. 교회는 삼위이신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고 그 하느님을 본보기로 하기 때문에 본성상 선교적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선교 명령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선교적 본성을 명확히 한다. 선포가 신앙과 신자 공동체의 기원이라는 것은 사도 행전에서 이야기하는 신앙 실천과 바오로 성인의 편지(로마 10,14-18 참조)를 보면 명백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선교 회칙에서 선포의 중심성을 강조한다.  

 “선교라는 복잡한 실재 안에서 초기 선포는 중심적이고 무엇과도 대치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 선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과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로 인간을 인도하고 회개의 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신앙은 복음 선포에서 생겨나고, 또 이 선포에 대한 각자의 개인적 응답에서 모든 교회 공동체의 기원과 삶이 시작된다. 모든 구원 경륜이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두는 것처럼, 모든 선교 활동은 그분의 신비를 선포하는 데 지향을 둔다”(「교회의 선교 사명」, 44항).

 

  6. 선포와 대화의 보완성

  

  6.1. 종교간 대화는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필수이자 의무가 되고 있다. 다른 종교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나 다른 신념을 가진 집단들과 만나는 것은 서로 다른 종교 전통들에게는 피할 수 없고 필연적인 일일뿐 아니라 유익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전해 주시는 새 생명을 선포하는 일을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반면,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선교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만이 아니라 새 생명을 증언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고 인류의 누룩이 되라고 하셨으며,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 자신의 종교 조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교 공동체 밖에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할 의무가 있다. 교회의 사명은 최근 수십년 간 대화라고 알려져 온 것을 통하여 인류와 종교에 이러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거기에는 서로를 풍요롭게 하고 하느님 나라를 증진하고자 하는 모든 형태의 활동이 포함된다. 그것은 앞으로의 종교간 만남에서 통상적인 절차가 되어야 한다.

  

  6.2.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선포를 위한 특별한 기회들이 있다. “종교 시장”에서는 시장에 나와 있는 다양한 상품들 가운데 안전한 피난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선포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하여, 또 흔히 사람들의 이동이 더욱 잦아진 상황에서 피상적이긴 하지만 더욱 쉬워진 개인적 접촉을 통하여 어디에서나 가능해졌다. 반면, 선포는 다수 속의 하나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불리한 점도 있을 수 있다.

선포는 특별한 요구가 있으며, 따라서 특별한 방식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선포는 다른 신앙을 존중하면서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제시되어야 하며, 가르침보다는 증언으로 제시될 때 더욱 잘 받아들여질 것이다. 선포는 보통 일반적인 접촉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선포는 이중의 토착화를 요구한다. 각 민족 문화에 대한 선포는 그들의 언어로 또 그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선포는 각기 나름의 하부 문화를 가진 연령 집단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매체의 특성인 포괄적 문화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선포가 믿을만한 것이 되려면 이해할 수 있고 개인과 집단의 더욱 깊이 있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선포는 완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차원의 개인 생활과 모든 측면의 사회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6.3. 선포의 중요성과 대화의 필요성은 이 둘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포에 열려 있는 개인과 집단에 복음을 전할 의무와 권리가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문화, 그들의 종교적 발전을 마땅히 존중하여야 한다. 또한 많은 이슬람 국가들의 경우처럼 개종을 목적으로 한 직접적 선포가 불가능한 상황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능한 유일한 선교 형태는 대화와 인간 증진이다. 물론, 선포든 대화든 교회 사목의 이 두 가지 형태 가운데 어느 하나에 특별한 성소가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샤를르 드 푸코의 작은 형제들이나 작은 자매들처럼 특별히 현존을 증언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느끼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훠콜라레 운동처럼 대화를 증진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느끼는 집단이 있으며, 대부분의 여자 수도 공동체처럼 자선 활동을 실천하는 데 헌신하는 집단도 있고, 대다수 선교회들처럼 직접적 복음 선포를 소명으로 삼는 집단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집단은 복음화와 대화에 대한 교회의 권리와 의무를 인정하여야 한다.

  

  6.4. 물론 대화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인 경우가 많다. 대화가 서로를 알고 풍요롭게 하는 것을 추구한다면, 선포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도전의 개념을 내포한다.

다른 한편으로 선포는 복음화 대상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받아들인 메시지를 그들이 내면화할 수 있도록 대화라는 방법을 전제로 하고 또 필요로 한다.

  

  6.5. 완전한 교회 선교는 교회 공동체가 한 가지 선교 활동만이 아니라 모든 주요한 선교 활동들, 곧 대화, 사랑, 전례, 선포, 인간 증진, 토착화를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인권과 종교의 권리에 의거하여 교회도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어디에서든 모든 상황에서 선교를 실천할 수 있도록 보장받아야 하며, 이러한 권리가 법으로나 실제로 인정되도록 보장해 줄 길을 찾아야 한다. 교회는 단지 대화의 실천만으로 축소되어 버린 비정상적인 상황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한 상황은 일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금과 같은 것으로서, 교회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 권리가 없다. 한 공동체가 자신 안에 갇혀버려 사실상 복음을 증언하기를 포기하거나 거부한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개인과 민족들의 구원에서 그리스도의 중심적이고 보편적인 역할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표시이다.

  

  6.6. 특수 상황에서 선교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실생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선교 활동을 이끌어 나가는 원천이며 힘이고 기준이다. 예를 들면 사랑이나 대화 성격의 활동만을 허용하는 상황이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나 실제로 말씀의 선포를 배제하는 교회는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며, 선교의 핵심 자체를 이루는 것, 선교의 추진력, 선교의 존재 이유를 없애 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6.7. 증언과 선포에 우선을 두는 다양한 활동에는 분명 서열이 있다. 대화를 포함한 다른 모든 활동은 선포의 토대 위에서 이해되고 완전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명령하셨지만, 또한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과 누룩이 되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므로, “구원의 경륜에서 볼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과 종교간에 대화를 하는 것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는 보지 않지만, 이 둘을 만민 선교의 차원에서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이 두 요소는 서로 깊은 관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차이점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혼동하거나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서로 맞바꿀 수 있는 동등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교회의 선교 사명」, 55항).

 

  결 론

 

점점 일치되고 다원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부각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만남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선교를 실천하도록 권유한다. 대화 방법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그 지도자들이 수행하는 모든 활동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사회 종교적 상황과 교회의 인식에 바탕해서 우리는 종교간 대화라는 구체적 활동을 통하여 다른 신앙인들과 다른 종교들에게로 우리의 활동 범위를 넓혀 가야 한다. 문제는 선포와 대화의 대립이 아니라 대화와 선포를 결합시키는 일이다. 선교는 교회의 성장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선익을 증진시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선교는 하나이며 동일한 종말론적 운명으로 부름 받은 인류 전체의 구원을 증진시킨다. 이러한 만남들이 가치 충돌이나 애매한 가치 평준화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신앙을 실천하고 선교에 충실하기 위한 몇 가지 기본 태도가 필요하다. 실질적으로, 그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과 관련해서, 또 다른 신앙인들에 대한 진정한 개방성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심화하고 강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자기 신앙을 끊임없이 심화하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점진적이고 너그럽게 이해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럴 때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고, 우리의 궁극적 운명에 이르는 길을 따라 걷게 될 것이다. 그 길을 따를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보기이자 삶의 활력으로 삼아야 한다.

 

(자료 번역-권정애, 원문“The new millennium and emerging religious encounters”,

「OMNIS TERRA」N.303)

 

주(註)

1. 「대화와 선포」, 28-35항,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가톨릭 교회의 공식 가르침」 (1963-1995), Francesco Gioia, 보스턴, 바오로 출판사, 1997년, 566-579면.

2. 「대화와 선포」, 608-641면.

3. 자고(ZAGO) M., “대화의 영성”(Spiritualit del Dialogo), Nuova Umanit XX(I998/5) 119, 631-647면.

4. 자고 M., BURROWS 안의 “교회의 선교 사명에 대한 설명”, 「구원과 대화」, Orbis Books, 1994, 83면.

5. 주요 입장들과 최초 제안의 종합에 대해서는 쟉크 뒤피의 “종교다원주의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향하여”(Towards a Christian theology of Religious Pluralism), Orbis Books,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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