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11호/여는 글, 2001년 전교주일 담화

2002. 1. 4. 오전 10:00:52

글자

여는글

최기산 주교 인천교구 부교구장

 

종교간 대화는 가능한가?

 

  머리말

 

  종교간의 대화는 가능한가?

 

  한국에선 지금까지 종교간의 많은 대화와 기도의 모임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는 어떤 특정 종교가 국교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소수의 신도를 가진 종교의 경우 다수의 신도를 가진 종교와의 대화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보인다. 여기서는 가톨릭의 입장에서 「주님이신 예수님」 문헌이 발표된 이후에도 종교간의 대화가 가능한 지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종교간의 대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시대에 우리 교회는 열교, 이교를 분명히 구별하였으며 가톨릭 신자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차별화하였다.

  특히 구원에 있어서 극단적인 논리를 편 사람들이 있었으니, 예수님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서만 십자가로 천국 가는 다리를 놓으셨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당시 교리교사들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가르쳐진 것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가톨릭 교회 밖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교도권은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W. 케른,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박순신 옮김, 가톨릭출판사, 1991. 40-48쪽)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구체적으로 이런 견해를 표현했는데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힌두교, 불교, 기타 종교[회교, 유대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도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모든 자녀들에게 전하는 바이다.”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는 계속 타종교들과 대화를 해 왔으며 특히 1986년 아시시에서 가톨릭 교회와 세상의 타종교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남녀 종교인들이 자신의 전통들을 포기하지 않고서 함께 기도에 참여하고 평화와 인류의 선을 위하여 함께 일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며 모임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 모임 후에도 가톨릭 교회는 여러 차례 전세계의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하는 국제회의를 마련했으며 특히 2000년 대희년을 맞으며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그간의 잘못을 회개한다는 것을 공식으로 발표하여 타종교들과의 대화의 폭을 넓혀 놓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2001년 5월 6일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사원을 방문하여 기독교계와 이슬람교도간의 갈등과 모든 종교의 반목과 갈등의 해소를 호소했다.

 

  아시아 교회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면서 개최된 주교대의원회의 아시아 특별총회가 폐막된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인도를 방문하여 「아시아 교회」라는 권고문을 발표하였다.

  이 문헌에는 특별히 아시아 대륙에서 종교간 대화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종교간의 관계들은 다른 신앙인들에게 열려 있고 기꺼이 들으려는 마음, 그리고 그들과의 차이점들 안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인 것입니다.”(「아시아 교회」, 31항) 아시아는 다른 대륙에 비해 가톨릭 신자의 수가 미세한 편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종교인들 안에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종교간의 대화가 급선무이다.

  자칫 한 국가 사회의 역행자들로서 가톨릭 신자들이 비춰진다던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존재들로 천대받을 때 심각한 박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화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최근에 나온 문헌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JESUS)에 대해서 아시아 주교회의는 우려의 목소리를 드높이며 이 문헌으로 가톨릭 신자들이 얼마 되지 않는 나라들에서는 그 파장이 어떠할 것인가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 문헌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며 심지어 가톨릭 신자들조차 대부분이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므로 이 문헌으로 큰 파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

 

  1. 종교간의 대화가 강조된다고 하여 모든 종교가 다 좋은 종교이니 아무데나 가도 된다거나 이젠 선교할 이유가 없다는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제5차 총회에서 “교회가 비록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의 종교 전통들에서 발견되는 참되고 신성한 것들이 모든 인간을 비추는 진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감심으로 인정하지만 그것 때문에 교회의 선교 의무가 감소되거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의심 없이 선포하려는 굳은 결심이 약화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제도 밖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될 수 있다는 사실이 하느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바라시는 신앙과 세례로 부르심을 철회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아시아 교회」, 31항)라고 밝혔다.

 「교회의 선교 사명」, 55항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구원을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오며 그들이 속하여 있는 교회공동체가 구원의 정상적 방법이라는 강한 확신을 종교간 대화에 이끌어 들입니다.”라고 강조한다.

 

  2. 종교다원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타종교의 창시자들과 동등시하면 대화의 문제는 간단하다는 주장이다. 각 종교의 창시자들을 위대한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고 오직 위대한 신은 하나라고 하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한 발상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오시긴 했으나 그분은 신으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분만이 우리 인생의 길, 진리, 생명이라고(요한 14, 6) 우리는 고백한다.

  교회가 필요한 이유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진리와, 이 구원을 위하여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주님이신 예수님」, 20항)

  우리 가톨릭의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관에 입각하여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을 목숨을 다하여 지킬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 시대에 “주님이신 예수님“ 문헌이 나온 것은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맺는말

 

  문헌 「주님이신 예수님」으로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정통성을 이어받은 가톨릭 교회를 통해 확실한 구원의 통로가 열렸음을 강조한다. 이로써 타 종교로부터 독선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가 있으나 이미 우리 교회는 그 내용을 주장해 온 터이다.

 “이 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사도4. 21)

  사실 다른 종교들 역시 자신들의 종교가 최고라고 주장할 것이다. 각 종교는 자신의 종교가 최고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대화에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간의 대화는 각 종교의 교리를 가지고 논쟁하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을 위하여 어떻게 하면 합심하여 봉사를 잘 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힘없는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당할 때, 민주주의가 훼손당할 때, 가난한 이들이 괴로워할 때 종교인들은 서로 대화하여 힘을 합쳐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7대 종단이 서로 모여 국가의 이익, 국민의 이익을 위해 힘을 합치고자 노력하고 있다.

  교리 문제로 상호 비방이나 한다면 그것은 종교인 스스로의 위상을 흠집 내는 것이다.

  상호존중 속에서 민중의 행복을 위하여 서로 대화를 나눈다면 대화가 중단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종교간 대화는 가능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2001년 전교주일 담화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9[88], 2)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온 교회에 은총의 시간이었던 구원의 대희년을 우리는 충심으로 기뻐하며 경축하였습니다. 신자 개개인이 경험하였듯이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깊은 데로 가도록” 재촉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히브 13,8)이심을 확신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열정적으로 현재를 살며, 신뢰의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봅니다(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1항 참조).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자세는 새 천년기에 모든 교회 활동의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는 희망으로 빛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10월 21일에 거행될 전교주일을 맞아 제가 모든 가톨릭 신자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2. 이제는 정말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미래를 바라볼 때입니다(히브 12,2 참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을 우리 앞에 펼쳐진 미래로 향하게 하고”([새 천년기], 3항)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선포하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라.’(시편 89,2)”고 촉구하십니다([새 천년기], 2항). 지난 해 전교주일에 저는 선교에 대한 투신은 예수님을 열렬히 관상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일깨워 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해 온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분의 광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고([축성 생활][Vita consecrata], 14항 참조)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는 일에 투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제자들은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주시하게 됩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마태 25,40.45 참조)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최초의 가장 위대한 복음 전파자”([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7항)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도 복음 전파자로 변화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기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바람을 깨닫게 됩니다(요한 17,2 참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1 디모 2,4)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에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신에 대한 아버지의 뜻임을 아시고,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루가 4,43)고 말씀하십니다.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신비한 방식으로 찾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인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 1,37). “그리스인들”은 미래 세대를 대신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님을 뵙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2,21).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참 빛이십니다(요한 1,9 참조). 인류는 자신들도 그 근원을 알지 못하는 내적인 힘에 이끌려 하느님을 “더듬어”(사도 17,25) 찾고 있습니다. 내부에서 끌어당기는 그 힘은 보편적 구원에 대한 열망이 고동치는 그곳 하느님의 심장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 힘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증인이자 전달자로 만드십니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성령 강림에서처럼 성령의 불과 당신 사랑, 그리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셨듯이 당신의 현존으로 우리를 채워 주십니다.

 

  3. 대희년의 또 다른 성과는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태도, 곧 믿음과 바람으로 앞을 내다보는 태도입니다. 명예롭게도 주님께서는 자비를 보여 주시며 우리 안에 당신께 대한 신뢰를 심어 주시고 각자의 직분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1디모 1,12.13 참조). 이러한 부르심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활 신분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러한 열정은 교회 안에 새로운 선교 의식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선교는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에게 선교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진정한 만남을 가진 사람들은 그분을 자기 안에만 가두어 둘 수 없으며, 그분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새로운 사도적 활동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단체가 기울이는 매일의 노력으로 실천될 것입니다. … 확신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른과 가족들, 젊은이와 어린이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때 그것의 근본적인 요구들을 감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1고린 9,22) 하고 말한 바오로의 모범을 따라, 각 사람의 요구와 그들의 감수성, 언어 등을 고려하여야 합니다”(40항).

  선교에 대한 부르심은 특히 아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특별한 절박성을 띠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만민(ad gentes) 선교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타당성을 지닙니다. 저는 순례 여행 동안 지켜 볼 수 있었던 인류의 모습을 제 마음 깊이 새겨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얼굴에 반영된 그리스도의 얼굴이며, “목자 없는 양”(마르 6,34)처럼 사는 사람들 속에 비친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모든 사람은 “여러 가지”(마르 6,34)를 배울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명백한 연약성과 불완전성에 직면하여 사도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인간적 유혹은 사람들을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 각자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신(마태 14,16; 마르 6,37 참조)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주님의 은총을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깊이 새겨진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을 깨닫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과 또 당신 은총으로 우리에게 해 주실 모든 것에 감사를 드려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4. 이러한 상황에서, 만민(ad gentes) 선교와 평생(ad vitam) 선교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아 온 모든 선교사,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어찌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삶 자체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영원토록”(시편 88) 선포합니다. 이 “영원토록”은 흔히 피를 흘릴 지경에까지 이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난 세기에 얼마나 많은 “신앙의 증인들”이 있었습니까! 하늘 나라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들의 아낌없는 자기 봉헌 덕분입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들을 기억하며 감사 드립니다. 그들의 모범은 모든 신자에게 자극과 힘이 되어, 자신들이 “수많은 증인들에게 구름처럼 둘러싸여”(히브 12,1) 있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게 합니다. 그 증인들은 말과 행동으로 모든 대륙에 복음이 울려 퍼지게 하였고 계속해서 울려 퍼지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사도 4,20 참조). 우리는 성령의 활동과 하느님의 은총이 나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2고린 12; 1고린 1 참조).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믿음을 얻고, 대신에 신비의 선포자이자 증인이 되도록 촉구받고 있습니다.

 

  5. 선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선물, 그리고 각 사람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며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는 선물, 곧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요한 3,16) 하느님, 사랑이신 하느님의 계시의 선물에 대한 기쁜 선포입니다. …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만민에 대한 선교 활동을 멈출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은 만민 선교의 일차적 임무입니다”([새 천년기], 56항). 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초대이며, 즉각적이고 아낌없는 대답을 요구하는 절박한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출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천사가 알려 준 첫 소식에 이끌린 목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본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지체없이 출발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우리는 세상의 길을 걸으며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여야 합니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다락방에서 당신을 만나도록 요청하십니다. ‘안식일 다음날’(요한 20,19) 저녁 그리스도께서는 다락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고’ 복음을 선포하는 위대한 모험에 나서게 하셨습니다”([새 천년기], 58항).

 

  6.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선교는 기도와 구체적인 투신을 요구합니다. 구석 구석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올해는 교황 비오 11세께서 전교주일을 제정하신 지 7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교황청전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하루를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로 정하고 모든 교구와 본당, 가톨릭 기관에서 같은 날에 이를 거행하고 … 선교 헌금을 권장하도록 하였습니다”(예부성성: 전교주일 제정, 1926년 4월 14일. 사도좌 관보[AAS] 19(1927), 23항 이하). 그 때부터 전교주일은 모든 하느님 백성이 선교 명령의 영구한 효력을 기억하는 특별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선교 활동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이며, 모든 교구와 본당과 교회 기관과 단체의 일”(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 2항)이기 때문입니다. 전교주일은 또한 "선교가 헌금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덕 활동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며, 생명과 재물뿐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81항)는 것을 재확인하는 적절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날은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날입니다. “주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성찬 거행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선교를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과 같은 날입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81항). 75주년을 맞는 이번 전교주일이 선교 정신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더 많은 공동 노력의 필요성을 성찰하고, 선교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기 위한 적절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7. 2001년 1월 6일에 있었던 대희년 폐막 강론에서, 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 강림의 열의와 새로운 열정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덕에 대한 매일의 노력과 기도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태도로 그분에게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분에게서 출발하여야 합니다”(8항).

  그러므로, 자비를 얻은 여러분,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용서하고 용서받은 여러분,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아픔과 고통을 겪은 여러분,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열의가 식어가려는 여러분,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은총의 해는 끝이 없습니다.

  새 천년기의 교회여,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노래하며 나아가십시오!(2001년 주님의 공현 대축일 폐막 미사 참조).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복음화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성령 강림일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신뢰로써 성모님께 의지합니다. 또한 그분의 전구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교회 공동체의 사명인 선교 의무를 끈기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축복을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6월 3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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