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과 함께하는 삶

2007. 2. 24. 오후 12:31:51

글자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제 머릿속에는 '새벽에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가 향수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을 온 저는 비탈진 언덕 위 판잣집에서 자취를 하였는데,

추운 겨울 북풍이 전선을 스치며 지나갈 때 내는 윙윙 소리를 마치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을 청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새벽이면 언제나 은은한 성당 종소리가 아침잠을 깨우곤 했지요.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렸는지, 마치 저를 초대하는 소리 같았습니다.

 

하루는 수녀님을 찾아가 성당에 다닐 수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예배당과는 달리 공부를 하고

찰고를 거쳐 영세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교리문답>책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길을 다니면서도 마치 영어 단어를 외우듯 틈만 나면 열심히 익혔습니다.

그러나 성당엘 다니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가 너무나

완강하게 반대하시는 바람에 접어야 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저는 시기가 늦어졌을 뿐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 후 우리 식구는 물론 그렇게 반대하시던 어머님도 세례를 받으시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선종하셨습니다.

 

영세 후 바로 레지오 마리애에 입회하였지요.

한 달 두 달 시간이 갈수록 묵주 기도의 매력이 저를 사로잡았고, 늘 주 회합 시간이

기다려졌습니다.

당시는 군정 시대로 군사 훈련이 있으면 공무원들도 함께 비상이 걸리는 때였습니다.

공무원이었음에도 저는 단 한번의 지각 없이 10년 이상 개근을 했고,

처음에는 작은 책임이 주어지더니 점점 확대되어 지금은 세나뚜스 단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단체 봉사자든지 인류 구원을 위해 제물이 되신 주님과 우리를 곁에서

지켜주시는 성모님의 인자하신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행을 조심하고, 변함없는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에,

저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완전히 순명하며 사셨던 성인 성녀들의 삶을 묵상하면서

 제 나름대로 고통을 즐거움으로 전환시키며 살아왔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평신도인 프랑크 더프 씨가 창설자여서 초창기에는 엄청난 푸대접을

받고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성체 조배를 하며 모든 어려움을 고백하고, 성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1931년 비오 11세 교황 알현 후 세계적으로 전파되었고,

1953년에는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습니다.

단원들도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열심히 노력해 교회 어른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빈곤에서 벗어나면서 점점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 또는 소집단주위로 바뀌어져 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주님, 저희 모두는 하느님께서 불러주셨고 뽑아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

이 세속에서 절대로 빗나가는 일이 없게 해주시고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2베드 1,10-11 참조)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팽종섭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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