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있어 소중한 것 -야곱의 우물 2002/10월호에 복음 묵상에서 옮긴 글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태 22,34-40)
◑ 병든 이, 갇힌 이, 헐벗은 이, 버림받은 이, 소외당한 이, 나그네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을 내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반면 나와 절친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다. 하지만 그들을 내 몸처럼 아끼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다. 내 몸은 얼마나 아끼는가. 조금만 탈이 나도 온 마음, 온 정성을 다해 간병(?)한다. 마치 하느님 섬기듯이.
내 몸이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렇게도 염려하면서 내 이웃이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둔감한지. 이웃은 누구인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 이것은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곧 황금률이라 일컫는 구절이다.
이 말은 결국 ‘너희는 나에게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 하지 말라’ 는 말과 같다. 곧 내가 편하면 남도 편하고 내가 불편하면 남도 불편한 법이니 남의 마음을 내 맘같이 잘 헤아려 주라는 뜻이다. 내가 바라듯 남이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사랑과 이해일 뿐이다. 나와 남은 결국 하나이다. 이해를 몰 이해로, 사랑을 배신으로 베푸는 것은 얼마나 인간답지 못한 일인가.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난다.
아프리카 밀림지대에 사는 ‘우츄프라카치아’라는 식물은 결벽증이 심해 누군가 건드리면 금방 시들어 죽어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박사가 연구한 결과 한번 만진 사람이 계속 애정을 가지고 만져주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없이 결벽하다고 생각했던 이 식물은 오히려 한없이 고독한 식물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누구의 우츄프라카치아인가? 혹은 누가 당신의 우츄프라카치아인가? 내가 누군가에 지속적 관심과 애정을 줄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그 애정과 관심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부담스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느날 그것이 살아졌을 때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
가까이 있어 소중한 것 그러나 너무나 평범한 일상 속에 있어서 소중함을 모르는 것, 이제 그런 것들을 찾아서 좀더 아끼고 지켜 나가야 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