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안보여서 행복해요 -문화순 수녀-
땜빵 수녀로 한 달간 봉사한 본당에서 한 자매를 만났다. 오후 4시면 그녀는 언제나 성체조배를 하고 있었는데 늘 미소를 머금은 환한 얼굴이었다.
하루는 그녀가 환자 방문을 간다며 내게 운전을 부탁했다. 비포장 산길을 돌고 돌아간 그곳엔 본인이 말기 암인 줄도 모르는 아주머니에게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데려간 것이었다.
언니 수녀와 환자가 대화하는 동안 그녀는 옆방에서 뇌성마비로 온몸이 뒤틀린 아이를 데려오더니 놀라운 솜씨로 함께 놀아주었다. 한참 후 다시 옆방으로 데려다주고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수녀님, 저도 장애자예요”
“어디가요?” 내 눈엔 한 군데도 장애로 보이는 곳이 없었다.
“제가 글자를 익히지 못한 장애자입니다”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불편 없이 자라다 시집을 갔는데, 한 달이 지날 즈음 글자를 익히지 못한 사실을 안 남편이 그때부터 저녁마다 술 먹고 와 때리기 시작했다. 쫓겨나 남의 집 굴뚝에서, 헛간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에 다시 들어가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에 매달렸다. 그런데 첫아이를 낳으니 뇌성마비였다.
그러자 그동안은 남편의 매질과 식모처럼 일하는 그녀가 불쌍했던지 적대적이지 않았던 시부모와 시누이까지 “너 때문에 이런 자식이 태어났다”며 당장 나가라고 난리였다.
그런데 둘째도 뇌성마비, 셋째도, 넷째도 뇌성마비였다. 그녀는 갈대가 없었다.
아무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던 그녀가 마음 붙일 수 있는 곳이 성당이었다. 한낮의 고요한 성당에는 아무도 없었고 십자가 위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듯 예수님만 매달려있었다. 그녀는 그 십자가 앞에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평안해졌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수녀님, 우리 하느님 아버지가 얼마나 좋으신지요! 내가 시집살이로 그 아이들 감당 못하는 걸 알고 아홉 살만 되면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 아이들 덕분에 성령의 열매를 얻었답니다.
첫째를 주시면서는 저에게 구원의 열매를 주셨어요. 세례를 받았으니까요. 둘째는 사랑의 열매, 셋째는 인내의 열매, 넷째는 은총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 열매를요”
너무나 행복했다는 그녀의 가식 없는 얼굴에서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내 얼굴의 가면 하나가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그다음에 딸 셋을 더 두었는데 세 명 다 공무는 못하지만, 장애아이는 아니라고 했다.
큰딸은 전문대학을 나와 취직했고 둘째딸은 고3이고 셋째는 초등학교 5학년인데, 이 셋째를 낳지 않았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느냐며 싱글벙글 한다.
막내딸을 가졌을 땐 이미 나이도 많고 둘째와 터울도 너무 나서 모두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신 귀한 생명이라 이리저리 피하며 간신히 나았는데 그 막내딸이 어찌나 귀염을 떠는지 파출부 일이 고되지 않았단다.
“출근해 일하고 있으면 ‘엄마, 힘내세요! ‘엄마, 지금 뭐하세요? ‘엄마, 나 지금 체육시간인데 마치면 곧 갈게’ 차례로 전화가 와요”
그녀는 딸들의 전화를 받으며 즐겁게 일하고 퇴근길에 성당에 들러 성체조배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 틈틈이 그녀는 신부도 수녀도 교우도 모르는 오지의 어르신들과 외로운 환자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글자를 모르니 어떤 신심단체에도 가입 못하지만, 단체들이 흘려 놓은 이삭을 줍는 일을 한다고 기뻐하는 그녀.
“수녀님, 저는요 하느님이 보이지 않아서 정말 좋아요. 만약 하느님이 보인다면 저 같은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 것 같아서요”
만약 하느님이 보인다면 성당은 똑똑한 사람들로 문정성시를 이루어 가난한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안식처로 찾아가기엔 문턱이 얼마나 높았을까?
수도자인 나도 보이는 하느님을 얼마나 찾았던가. 한 번만 나타나 주시라고 매달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보이지 않아 행복해하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내 마음이 그녀에게 들킬까봐 쿵쿵거렸다.
오늘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공생활을 하고 있다. 2천 년 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그 사랑을 십자가 아래로 불러 모으고 가난한 자들을 통해 이렇게 매일매일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다이제스트 2011.8월호에 실린 글을 옮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