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이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모습(2/9)

2005. 2. 9. 오후 10:17:10

글자
마태 4, 1-11,  

*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순 시기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전 40일 동안을 교회는 사순 시기라 부르며 전례에서 특별한 시기로 기념합니다. 40일의 사순 시기 관행은 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우리의 신앙 생활사에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태초에 인간이 유혹에 빠져 범죄 하였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후 마귀의 유혹을 체험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두 개의 이야기들은 실제 일어난 사실을 우리에게 보도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를 위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림과 같은 구체적 이야기 안에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담은 것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인간은 그 기원에서부터 하느님과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인간 생명이고 하느님이 베푸신 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불행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행동한 데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는 인간이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나무열매”를 먹는 유혹에 빠졌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바는 인간은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이만 보이면, 무엇이라도 해버리는 비극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두 주인공은 하느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먹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행해야 하는 선과 행하지 말아야 하는 악을 판단하면서 하느님과 동료 인간 앞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광야에서 유혹 받는 예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유혹하는 자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탐스럽고 자기를 영리하게 해 주는”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어 주어서 모든 사람이 탐하는 것을 주는 하느님을 가르치라는 유혹입니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사람이 잘되는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이 되라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것이지, 사람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두 번째의 유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기적을 하라는 말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신앙인들이 받는 유혹입니다. 기적한다고 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많이 몰려옵니다. 가톨릭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론매체가 그런 사이비 종교집단들에 대해 보도하는 바를 가끔 봅니다.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이 보이는 술수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예수님은 이 유혹도 거절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 6,16)는 구약성서 말씀을 인용하여 거절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생활 무대로 주신 이 세상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초능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과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한계를 지니고 그들과 더불어 삽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자기도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려 노력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 유혹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역시 탐스러운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도 한 마디로 거절하셨습니다.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이사야서(42,1)의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먹을 것을 얻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초능력을 발휘하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는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권력과 부귀영화를 탐하고 그런 것을 위해 사생결단 뛰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인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봅니다. 형제자매는 자기 자신을 뽐낼 대상도 아니고, 지배할 대상도 아닙니다. 형제자매는 위해주고 감싸주면서 더불어 살 대상입니다. 우리에게 탐스럽고 우리를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형제자매는 우리의 경쟁상대로만 보입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으셨다는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일들입니다. 재물이 소중하고, 남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능력을 탐하고, 부귀영화를 꿈꾸는 우리들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받으셨다는 유혹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빵을 주고 기적을 주고 부귀영화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의 두 주인공과 같이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두고 자기에게 탐스러운 것을 택하는 사람이 되라는 유혹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야기 다음에 즉시 유혹의 이야기를 갖다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본받아 재물이나 기적이나 부귀영화를 주는 하느님을 찾지 말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그런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사람은 자기 환상을 좇아 살지 않고,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며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과 더불어 삽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생명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광야와 같이 황량하게 살아야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 감수할 수밖에 없는 각종 실패와 병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독 등은 우리가 광야에 내던져진 순간들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상실의 순간들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했다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기진하여 허덕이는 광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때 빵과 기적과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고 하느님을 택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 자비를 실천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 능력, 부귀영화도 우리는 언젠가 결정적으로 버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여 하느님에게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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