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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에는 그 어떤 설명이나 해설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그 안에 깊이 머무르며 우리 스스로를
똑똑히 비추어 보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여인처럼 용서받은 이로서 눈물을 흘릴 만큼
깊이 감사하며 주님 가까이에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집주인인 바리사이처럼 속으로 여인과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판단하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바리사이에게서
자신과의 더 큰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잖은’ 바리사이는 예수님에 대한 호감으로 자신의 집에
초대했겠지만, 그의 속내는 아직 그분께 가까이 가려는 갈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깊이 감사할 것도, 가장 낮은 자세에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리고 입을 맞추는 순종의 모습을 보일 의향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렇게 남아 있기 쉬울 것입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는 자신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애써 예수님께 매달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을 ‘교만’이라고 부른다면 너무 야박할까요?
교만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 ‘은총’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하고 경건해 보이는
삶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은 교만에 물들었다면,
가장 중요한 것, 곧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순간’들을
붙잡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현대의 출중한 그리스도교 작가 가운데 하나인 영국의 루이스는
왜 교만이 신앙의 가장 큰 장애인지를 그의
『순전한 그리스도교』에서 이렇게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항상 눈 아래로 사물과 사람을 보며,
그러는 한 그는 자기보다 높이 있는 존재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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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내게 있는 향유 옥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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