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2014. 7. 5. 오전 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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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단식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단식의 실천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 그분의 종교성을 규정하고 싶어 했던 당대의 많은 ‘종교인’에게 중요한 문제였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아마도 매우 엄격한 단식과 고행을 종교성의 핵심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뿐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예수님께서 단식을 잘 지키시는지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처럼 광야의 고행자가 아니었지만 계명의 철저한 준수가 그들이 이해하는 종교성의 핵심이었습니다. 따라서 단식 규정의 준수 또한 예수님의 종교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즐거이 어울려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루카 7,34) 하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단식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확신한 종교성의 기준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참으로 원하셨던 것은 혼인 잔치로 비유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감지하고 그 초대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달콤하고 편한 것만 찾는 태도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겠다는 결심을 품고 있을 때 온전하게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단식은 이러한 관점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기쁨을 표현하고 숙성해 갈 수 있는 단식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새로운 단식이란 단지 자신의 죄에 대한 속죄와 회개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을 바라보는 마음이자, 자신의 종교적 ‘업적’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종교적 실천에 애쓰면서도 ‘주님은 언제나 더 크신 분’이라는 교회의 오래된 격언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는 종교성의 기준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과 성찬과 삶의 여러 사건 속에서 드러내시는 기쁨의 초대를 섬세하게 알아듣고, 새로운 삶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 나눔의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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