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혼인잔치의 비유 (마태 22, 1-14)
예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 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자의 발과 손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사실 부름 받은 이들은 많지만 뽑힌 이들은 적다.”
[해설] 이야기의 구성은 선택과 거절과 재선택이라는 과정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주인이 종을 시켜 두 번씩이나 정중하게 초대하는데도 손님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핑계삼아 한결같이 거절한다. 마치 주인의 명예를 떨어뜨리기 위해 서로 공모라도 한 것과도 같이 세 번 되풀이된다. 이 점은 이야기의 전개과정이 청중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처음 두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간 반면, 세 번째 사람은 그를 도와준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초대받은 손님들 셋 모두가 주인의 청을 거절한다. 이 삼중거절은 주인의 초대가 손님들에게 철저히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첫 번째 핑계는 밭을 샀기 때문에 둘러보아야 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빤한 거짓말이다. 밭을 사는 사람은 매매계약을 하기 전에 먼저 밭을 둘러보기 마련이다. 두 번째 핑계도 마찬가지이다. 겨릿소 다섯 쌍을 사기 전에 밭 임자는 소를 부려 보았을 것이다.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에서는 밭의 면적을 재기 위하여 ‘폐단’이라는 단위를 사용하였다. 한 ‘폐단’은 황소 한 겨리로 하루에 갈 수 있는 밭의 면적이다. 법으로 제정한 ‘폐단’은 황소 한 겨리가 일 년 동안 갈 수 있는 밭의 면적인데, 좋은 밭일 경우 한 ‘폐단’은 9 헥타르 정도 된다. 따라서 겨릿소 다섯 쌍을 산 밭 주인은 45 헥타르의 토지를 소유한 것이니 대지주인 셈이다. 세 번째 핑계는 결혼과 관련이 있다. 이 핑계 역시 정당화 되지 않는다. 새신랑이 미리 통보된 만찬 날짜와 자신의 결혼 날짜가 겹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고,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사전에 양해를 구했어야 마땅하다. 또 그곳이 작은 마을이라면 온 마을 사람들이 혼인잔치에 참석할 터인데, 만찬 주인이 겹치기로 만찬날짜를 잡고 손님들을 초대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와서 손님들이 초대를 모두 거절했다고 보고하자, 주인은 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식탁을 채우라고 명한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 둘 빠질 수 있겠으나 모두가 다, 그것도 핑계 같지 않은 핑계를 대며 거절하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모욕을 당한 주인은 이제 자신의 명예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에서 배회하는 가난한 서민들을 불러들여 식탁을 채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그가 처음 초대한 사람들을 모욕하기 위한 극단적 행동인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잔치의 비유’에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 또 이 비유의 청중은 누구인가? 비유의 핵심은 선택된 사람들의 거절과 주인의 보편적 재선택의 대립에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선민이다. 구원의 혜택에 대한 우선권과 특권을 지닌 그들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 비유의 청중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루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양의 비유’, ‘은전의 비유’,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 나라를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는 당신 자신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인간의 저항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천명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명예나 체면까지 포기하시고 거리에서 모아들인 가난한 사람들과 식탁을 함께 하시는 분이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특권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호소하신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특전에 연연해하지 말고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에 눈을 떠야 한다. 과거의 전통만을 고집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이 끝내 거절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만찬은 결국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가 필요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마태오 복음의 저자는 예복을 갖추어야 한다고 밝힌다. 이 예복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최후심판의 비유’ (마태 25,31-46)가 가르쳐 주듯이, 우리 주변의 이웃형제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일이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라는 마태오 복음 비유의 마지막 말씀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체적 결단을 요구하는 경고이자 호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