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인수신부님글중에서...

2006. 10. 2. 오후 1:39:58

글자

호인수신부님(인천교구)

 

살며 사랑하며>

어머니(陵城 具씨 然粉)가 돌아가셨다.
여든 여덟 번째 생신을 닷새 앞둔 지난 6월 2일 오후 2시 15분에 며느리가 잡고 있는 휠체어에 앉아서 창밖의 가로수를 바라보시다가 주무시듯 고개를 떨어뜨리셨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참 잘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노인들이 부러워할 만큼 선종(善終)이요 호상(好喪)이라 하더라도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내 슬픔은 줄어들지 않았다.
사흘 동안 어머니 시신을 지키며 문상객들을 맞이할 때는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시신을 우리 집 가정묘지의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바로 옆에 모시고 난 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울컥울컥 가슴이 메어지고 눈물이 솟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렇다. 이건 분명히 커다랗게뻥 뚫린 구멍이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다.

이 세상에서 유독 나만 어머니를 여읜게 아닌데 어쩌자고 나는 이렇듯 슬픔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솔직히 고백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들 보다 특별히 더 륭했거나 위대한 인물은 분명 아니셨다.
그저 다른 보통의 어머니들만큼, 꼭 그만큼 가족들에게 헌신적이셨다. 다른 어머니들 보다 특별히 더 모질고 험한 인생을 살아오신 것도 아니다. 그 연세의 노인들이 대개 그렇게 살아오셨듯이 우리 어머니도 그와 비슷한 정도로 일제의 억압과 전쟁 전후의 가난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사셨다.
난리 통에는 아들도 하나 잃으셨다. 아버지와 혼인해서 70년을 사시는 동안 다른 할머니들
만큼, 꼭 그만큼 남편과 자식들 때문에 속이 썩으셨을 게고 가슴에 한도 많으셨을 게다.

가끔 속이 상하시면 “남편 덕 못 본 년이 자식 덕 보겠냐?”고 한숨쉬시며 눈물 흘리시던
모습도 우리나라의 평범한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런 분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머니를 땅에 묻고 나서 집에 돌아와 우리 형제들이 어머니의 자질구레한 유품(유품이
랄 것도 거의 없다. 어머니는 당신이 미리 버릴 건 버리고 간직할 건 간직하면서 다 정리
해 놓으셨으니까.)들을 정리하다가 낡고 작은 손가방 속에서 손바닥만한 종이 쪽지 몇 장
에 삐뚤삐뚤한 낯익은 글씨체로 써놓으신 편지들을 발견했다. 여기에 그 편지들을 소개하
려 하는데 그러기 전에 먼저 지난 1988년에 써서 시집 ‘백령도’에 이미 발표한 바 있는 나
의 졸작 ‘어머니’라는 시를 다시 한번 인용하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될 듯 싶다.

   집 떠날 때 들고 나온 손가방 밑창 아래 / 누런 갱지에 정성껏 싼 만원 짜리 열 장 / 어
머니 / 당신은 그 갱지에 서툰 글씨로 / 밤새껏 저에게 편지를 쓰셨습니다 / 제발 술 많이
먹지 말고 / 모든 사람을 꼭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 무슨 일이든 앞장서 나서지 말고 / 남
들처럼 자동차 면허증이나 하나 따라고 / 마지막으로 내 나이 일흔셋이니 / 얼마 남지 않
은 명줄 / 남에게 폐 안되게 선종하도록 기도하라고 / 볼펜 꼭꼭 눌러 아프게 쓰셨습니
다 / 말씀대로 성냥불 그어 편지를 태우면서 /사십 나이에 울컥 눈물이 솟았습니다 / 폐병
쟁이 저에게 개소주 들고 오셨던 시골길 10리 / 그 뜨거운 삼복 태양 아래 돌아서서 우시
던 어머니 / 제가 이른 새벽 쇠고랑차고 경찰서에 끌려갔던 / 70년대 말 어느 해 가을 추
석 / 어머니는 주저앉아 온종일 가슴을 치셨습니다 / 어머니 / 오늘은  장대비가 죽죽 쏟
아지고 / 섬은 온통 해무에 덮여 /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날입니다 / 궁상 이 흐를 만큼
안 잡숫고 안 입으신 돈 십만 원 / 분부대로 요긴하게 쓰여질 때 기다리며 / 책상 속 깊이
조심스레 감춰두었습니다  

1988년에 내가 휴가차 집에 왔다가 다시 근무지인 백령도 성당으로 돌아갈 때 현금 십만
원과 함께 내 가방 밑창에 넣어주셨던 편지와 대동소이한 내용의 편지들이 어머니의 낡
은 손가방 안에서 다시 발견된 것이다. 그 중에서 제일 오래됐음직한 편지를 인용한다. 생
생한 어머니의 필체와 목소리를 실감할 수 있도록 글씨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써보겠다.
  
   “199십2년 구월말일 엄마가 아들 신부한테 마지막 부탁
   사랑하고 존경하올 신부에게 부탁하오 술은 조금식 안주는 만이들고 육신괄이(관리)
을  잘해서 건강해야 하은님(하느님) 뜼을일우고 노인들부터 아이들까지 사랑해주고 강논
준비을 충분이해서 모은 사람이 다 잘듰고 열심이 밋고 살두룩 도와주오 엄마은 육신선생
만 골도하고 영신생명은 습관적으로 살아온 이어미 위해 기도 만니 부탁하오 형제들에  
영신사을 부탁하오 신부 노후을 생각해서 조금 은행에 막겨슸니(맡겼으니) 어려울때 차  
저쓰고 식사 걸느지말고 잘챙겨들고 아모리 어려운 때에도 준님께서 함께해주시고 성몬  
님니(성모님이) 지켜주신이 항상 감사하고 기뿌게 살다가 천국에서 만나도록 약속하오    
예수 마리야 성심이여 사제 분도와 모은(모든) 사제을 보호하시고 구원해주소서”

  그러셨다. 우리 어머니는 1992년, 아니 벌써 그 이전부터 아들인 내게 죽음을 앞둔 마지
막 유서 같은 편지를 쓰신 것이다. 아래의 편지와 함께 내 이름으로 된 색이 바랜 통장도
나왔다.

  “엄마가 사랑하은 아들신부외게
  노후을 생각해서 3천4뱅만원 용현동성당시용조합에 적금 3천4뱅만원 십년덴거야 이자
관게로 이천만원 천4뱅만원 한 통장에 햇스니 다시할 때 잘보고 하도록하오 돈우숙게(우
습게)생각하지말고 여육간(영육간) 차저쓰도록하오 엄마가 꼭 부탁하오 술은 조금식 안
주을 만이들고 실수업시하오 엄마 꼭 부탁이요 몸압푸면 즉시 병원가고 건강하게 사아야
(살아야)하고십은일 하은거요 만은 사람이 똑똑한 성인신부라고 하은데 노인서 아이들가
지 칠절(친절)하게 사랑해주오 항상”

어머니가 써놓으신 또 다른 쪽지(“엄마가 신부 위해서 은행 조금 막낑거야 4십년 키운 돈
이야”라고 쓰신)를 보면 어머니는 자그마치 40년 전부터 아껴서 모은 돈을 전부 혼자 사
는 맏아들이 걱정되어 신용조합에 맡겨 놓고 아무한테도 말씀을 안 하시고 돌아가신 것이
다. 다만 어머니의 글씨가 적혀 있는 쪽지가 혼자 어머니의 뜻을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돈의 출처는 묻지 않아도 뻔하다. 우리 형제들이 겨우 명절 때나 생신 때 용돈 쓰시라
고 조금씩 드린 것이 다일 터다. 이제 어쩔 수 없이 홀로 되신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시며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생각해서 우시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와 한
방에 사시면서도 생전에는 전혀 눈치를 못 챈 일이라고 하셨다. 갑자기 뜻밖의 거금이 생
겼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의 쪽지는 온 집안 식구들을 통곡하게 했다. 우리 형제들은 아무도 왜 어가 큰아들에게만 돈을 주셨느냐고 섭섭해하지 않았다.
나는 도저히 그 돈을 받을 수가 없어 그냥 그대로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 뜻대로 처분하시라고.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의견을 모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머니 따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때는 오시는 손님들에게 조의금을 일체 받지 않고 정성껏 대접만 하기로. 지금까지 해드리지 못한 일흔, 여든 번째 생신과 나이 많다고 누구나 받는 게 아니라는 회혼(回婚) 잔치(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당신들을 위한 잔치 자리를 강력하게 거절하셨다.
우리 형제들이 같은 요구를 두번 다시 하지 못할 만큼.)를 차리자고.이제 가장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편지를 인용할 차례다.

이 편지는 병원에서 사용하는 메모지에 쓰신 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자주 편찮으셔서 누나가 경영하는 산부인과 병원에 딸린 살림집에 계시면서 주사도 맞고 물리치료도 하시던 때에 쓰신 것이 분명하다. 그 전의 편지보다 글씨나 맞춤법도 훨씬 못하다. 연세가 많아지시면서 근력이 하루하루 눈에 띄게 떨어지셨다는 증거다.

  “엄마가 아들 신부한테 마지막 부탁하오 술은 좀식(조금씩) 들고 안주은 만니(많이) 들
고 노인들부터 아이들가지 만니 사랑하고 강논준비을 열심니 해서 모은(모든) 사람이 다
잘듯고 열심이 밋고 살두록 도와주오 아버지 하은님(하느님) 사제 불으신지 2십오년이 지
낫습니다 잘 지켜주신 은헤 감사드림니다 예순님 사제 분도에게 건강과 지회(지혜)와 능
역(능력)주시고 항상 준님을 모시고 끘날까지 깁뿌고 즐겁게 살다 끗날외 사제로 안어가
시 옵소서 부족한 이제인(죄인) 막다리나(막달레나) 사제 분도외게 부족햇던 잘못또 용서
해 주옵소서 아들 사제에게 부탁하오 한달에 한번식 식구들이 모여서 영신사 돌봐주고 자
미인은(재미있는) 대화하고 깁뿌게 살아가기 발아오 만사에 감사하고 준님 모시고 항상
설오(서로) 사랑하며 살게해 주옵소서”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내가 사제가 된 날부터 며칠 전 돌아가실 때까지 20여년이 넘는 긴
세월을 밤낮 똑같이 맏아들 걱정 하나만으로 사신 것이다. 술 먹고 실수나 안할까, 교우
들 차별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나 듣지 않을까, 혼자 사는 몸 앓아 눕지나 않을
까, 정의롭게 산답시고 감옥에나 가지 않을까, 늙고 병들면 누가 봐줄까 등등.

명색이 사제인 내가, 예수의 부활과 우리 믿는 이들의 부활을 믿고 또 믿어야 한다고 가르
치기까지 하는 내가 이렇게 아무런 신앙심도 없는 사람처럼, 어쩌면 그들보다 더 슬픔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래도 되나?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 나눌 수
있는 아버지가 한 분 계시면 좋겠다고 편지마다 목 메이게 반복하는 캐나다의 최종수 신
부에게 “짜아~식 되게 궁상떠네”하며 피식거렸던 난데 내가 지금 이 모양이다.
어머니는 쪽지 편지 몇 장을 남겨놓고 돌아가셨다. 이제는 아버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처럼 늠름하시던 아버지가 어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영 몸을
못 가누실 만큼 기울어지셨다. 바로 뒤따라가시려나? 또 쿵! 하고 가슴 한쪽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다. 시를 한 수 썼다.

   개구리와 맹꽁이가 맹렬하게 우는
   저녁 논두렁을 걷다가
   문득 고개 쳐들어
   철쭉빛 하늘에 새로 나는 별들을
   하나 둘 셋 세어보네
   아 때마침 뒷산에서
   소쩍새 울음소리 들리네
   외로움이 어디선가 밀려와 바람처럼 스며드네
   헉- 숨이 막힐 듯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그리움
   외로움이네  
                -서포리 2,  전문-

 

우연히 발견해서 기냥 올려 봅니다

즐거운 추석 되십시오

댓글 3

  • 2006년 10월 2일 오후 3:54

    '어머니~!' 그러면 전, '명태'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생각나요. 어떤 아들이 첫 취직 선물로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왔다고 하기에 엄마가 열어봤더니, 그 안에 명태대가리만 한가득 담겨 있더라는 서글픈 이야기... 이유인즉 아들한테 좋은 거, 맛난 거 먹이려고 어릴 때부터 아들은 명태 몸집살만 먹이고 자기는 머리를 더 좋아한다며 명태 대가리만 먹었더니

  • 2006년 10월 2일 오후 3:57

    그 아들이 커서까지 그런 줄로만 알고 있다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결혼해서 자기도 자식을 낳아 기르게 되자 그때 엄마심정을 깨닫게 되더라는 일화를 고등학교 담임새임께 듣고 지금까지 내내 기억하고 있는데요. 우리 엄마들 세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말 희생의 대명사들이죠.^^ ...... 형제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 2006년 10월 4일 오전 12:09

    자그마치 40년을 혼자 사는 맏아들을 위해 돈을 키워오셨다니,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에 눈물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