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보리

2004. 9. 6. 오전 10:11:08

글자

                                                        가을보리

 

한 농부가 평생 농사를 짓다가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죽는 일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철따라 부지런히 농사를 짓다가, 자식을 낳고, 세 끼 밥을 맛있게 먹으며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일은 자연의 이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금 남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는 죽기전에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꼭 있을 것 같아 그것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는 일로 하루 해를 보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없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참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죽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살아 생전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런 가운데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그는 먼산에 이는 아지랑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아들을 불렀다.

 

"아들아, 나를 따라 오너라."

 

그는 아들을 앞세우고 보리밭에 가을보리를 심게 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왜 봄에 가을보리를 심으라고 하나 의아했으나 말없이 아버지의 명에 따랐다.

 

"특별히 이 보리밭을 잘 가꾸도록 해라."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보리밭을 가꾸는 데 정성을 다했다.

제때 거름도 주고 풀도 뽑았다. 그렇게 정성을 들인 탓인지 보리는 보기 드물 정도로

쑥쑥 잘 자랐다. 그런데 수확기가 되어 보리를 거두려고 하자 정작 보리가 패지 않았다.

보리가 웃자라기만 했을 뿐 정작 보리라는 열매는 맺지 않았다.

아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이삭이 패지 않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어떠냐? 보리 이삭이 잘 팼느냐?"

 

망연자실하고 있는 아들에게 다가와 아버지가 말했다.

 

"아닙니다. 이삭이 패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들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제 죽기전에 꼭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아들아, 내 말을 잘 들어라. 가을 보리를 봄에 심으면 절대 열매를 맺지 않는다.

가을보리는 가을에 심어 혹독한 겨울의 눈보라를 견디며 자라게 해야

이듬해 봄에 튼튼한 보리로서 자라서 알찬 열매를 맺는다.

그것이 가을보리의 운명이다.

가을보리가 진정한 보리가 되기위해서는 겨울이라는 고통과 인내가 필요하다.

고통이 없는 온실같은 평화는 오히려 가을보리에겐 절망이며 죽음이다.

아들아, 이렇게 가을보리처럼 고통없는 열매는 없다.

너도 이제 네 인생의 고통을 피하려 들지 말아라.

네 인생의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정 호승/당신의 마음에 창을 달아드립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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