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8월9일)

2014. 8. 8. 오후 9:43:31

글자

♡8월 9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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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나티(Nathy)

성 펠림(Felim)

축일  8월 9일 

아일랜드 전역에서 공경하는
성 나티와 펠림(Felim)의 생애는 불확실하다.
성 펠림은 데비아의 아들이며 킬모어(Kilmore)의
첫 번째 주교였음은 확실하다.
성 나티 크루임티르(Nathy Cruimthir)는
아일랜드 북서부 코노트(Connaught)의
슬라이고(Sligo) 출신으로 성녀 아트락타(Attracta)의
전기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성 핀니안(Finnian)의 명에 따라 아콘리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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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누미디코(Numidicus)
 
축일  8월 9일 

성 누미디쿠스(또는 누미디코)는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동안에 순교한
아프리카 순교자 중 일원이었다. 그는
혹독한 시련을 받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다는
다른 전승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Carthago)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는 그 후 사형장에서
타고난 재들 사이로 질질 끌려 다니다가
나중에 발견되었는데 아직 살아있었고,
카르타고의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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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데레사 베네딕타(십자가의)
(Teresa Benedicta of the Cross)

축일  8월 9일 

1891년 10월 12일 독일 동북부 지역의
브레슬라우(Breslau)의 전통 유대인 가정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난 성녀 에디트 슈타인
(Edith Stein)은 두 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Siegfried Stein)를
일사병으로 여의고, 열심한 유대인이었던
어머니 아우구스트(Auguste Stein Courant)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거행되는 유대교 전통 예식을 보며 자랐고,
유달리 고집스럽고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11세 때 숙부의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또 가족과 친지들의 형식적인 유대교 의식과
기도에 실망하여 더 이상 참석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까지는
브레슬라우에서, 그리고 1913년부터는
괴팅겐(Gottingen) 대학으로 옮겨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일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간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1916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후설(Edmund Husserl)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개인조교가 되었다. 그 후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 취임
논문을 제출하고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브레슬라우로 돌아와 계속 철학 연구
논문들을 집필하던 중 1921년 여름 같은
괴팅겐 학파 친구인 콘라트 마르티우스와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던 농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친구 부부가 외출한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를 읽고,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신이 그녀를 사랑해 왔으며,
그녀가 전 인격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 후 그녀는 평화를 얻었고,
이듬해 1월 1일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할 의지를 확고히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와 지도신부의 만류로 이를
연기하였다. 그 대신 지도신부의 제안으로
1931년까지 슈파이어(Speyer)에 있는
성 막달레나 수도원 교사 양성 학교와
도미니코 수녀회의 여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점차 후설의
관념론적인 철학 노선을 떠나 그리스도교 철학의
실재론적인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계속 왕성한 교육 및 학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발처 아빠스로부터 카르멜 수도원
입회를 허락받고 어머니와 힘겨운 이별을
나눈 뒤 1933년 10월 14일 쾰른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수도명을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a Cruce)로
정하였다. 입회한 후에도 수도원 원장의
적극적인 학문 지원에 힘입어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36년 9월 14일 첫서원을 하였으나,
바로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지녀왔던 유대교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1938년 4월 21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고,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이를 피하기 위해
수도원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
로사(Rosa)와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Echt)
카르멜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때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였고,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모든 비아리안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1942년 8월 2일 언니 로사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그녀는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 수용소를
거쳐 베스터보르크(Westerbork)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해 8월 7일 이들 중 987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두 자매는 이틀 후인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사망한 지 20년 만인 1962년 1월 4일
쾰른의 대주교 프링스(Josef Frings)
추기경은 그녀의 시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1980년에는 독일 주교회의를 거쳐 로마에서
시복절차를 위한 공식적인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독일을 방문한 1987년 5월 1일 쾰른에서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로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성식에서 그녀를
“이스라엘의 탁월한 딸이자 전세계를 위한
성인으로서 교회의 충실한 딸”이라고
칭송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듬해 10월 1일 자의교서를 통해
시에나의 카타리나(Catharina) 성녀와
스웨덴의 비르지타(Birgitta) 성녀와 함께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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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미시아노(Domitian)

축일  8월 9일 

성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또는 도미시아노)는
성 도나티아누스(Donatianus, 8월 7일)를
계승하여 프랑스 샬롱쉬르마른의 주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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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로마노(Romanus)
 
축일  8월 9일 

로마의 군인이었던 성 로마누스(또는 로마노)는
감옥에서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에
의하여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로마누스는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라우렌티우스가 순교하기
하루 전날에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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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피르무스(Firmus)

성 루스티코(Rusticus)

축일  8월 9일 

같은 혈족인 성 피르무스(Firmus)와
성 루스티쿠스(또는 루스티코)에 대해
전해 오는 이야기는 그다지 신뢰할만하지는 않다.
그에 따르면 그들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통치 때 이탈리아의 베로나(Verona)에서
순교한 베르가모(Bergamo)의 저명한
시민들이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이러한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아프리카 순교자들의 유해가
베로나로 이장되고 나서 그들을 그 지역의
성인으로 만들기에 적합한 이야기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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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첼리아노(Marcellian)
 
축일  8월 9일 
  
성 세쿤디아누스(Secundianus)와
성 마르첼리아누스(Marcellianus, 또는 마르첼리아노)
그리고 성 베리아누스(Verianus)는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이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출신이라는 것 외에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적다.
성 세쿤디아누스는 원로원 의원 또는 정부 관리였고,
나머지 두 성인은 학자 또는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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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율리아노(Julian)

성 마르치아노(Marcian)
 
축일  8월 9일 

성 율리아누스(Julianus)와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 또는 마르치아노)
그리고 열 명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상파괴주의자들을 반대한
이유로 이사우리아 왕조의 레오 3세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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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리아노(Verianus)

성 세쿤디아노(Secundian)

성 마르첼리아누스(Marcellianus)
 
축일  8월 9일 

성 세쿤디아누스(Secundianus)와
성 마르첼리아누스(Marcellianus) 그리고
성 베리아누스(또는 베리아노)는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이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출신이라는 것 외에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적다. 성 세쿤디아누스는 원로원 의원
또는 정부 관리였고, 나머지 두 성인은
학자 또는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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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미그디오(emygdius)

축일 : 8월 9일

전설에 의하면, 에미그디오는
트리엘에 살던 이방인 튜우튼 사람인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로마로
갔다가 큰 봉변을 당하고 축출되었는데,
그가 이방인들의 신전에 있는 우상을
파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어 아스꼴리 피체노 지방을
순회하는 복음 전도사가 되었는데, 그가 수많은
개종자를 얻고 전도사업에서 크게 성공한 이유는
그 자신이 디오클레씨안의 크리스챤 박해 때에
체포되어 참수당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296~304년 사이에 교황으로 재임하였던
마르첼리노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에미그디오는 지진 방지를 위한 수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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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오스왈드(oswald)

축일 : 8월 9일

그의 부친 에텔프리트가 617년에 레드월드에게
피살되었을 때, 노스움브리아에서 스코틀랜드로
강제로 끌려갔었다. 이때 그는 스코틀랜드의
이오나에서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였다.
그후 그의 삼촌인 에뒨왕마저 메르시아의
펜다왕과 웰스의 왕 카드왈론에 의하여 피살되자,
그는 군대를 일으켜 카드왈론을 헥삼 교외의
전투에서 물리치고 노스움브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만일 이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에는
이 승리를 성 골룸바에게 바칠 것이라고 약속하고,
전투 전날에는 거대한 십자가를 세웠다.
이리하여 그는 성 에단에게 전국에 복음선포를
하도록 도와주면서 린디스파른섬을 기증하고
주교좌로 삼도록 배려하였다. 그는 성당과
수도원을 많이 세웠고, 스코틀랜드에서
수도자를 이주시켜 자기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게 하였다. 또한 그는 웨섹스의 첫번째
크리스챤 왕 치네질스의 딸인 체네부르가와
결혼하였는데, 불과 몇년 후에 펜다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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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John)

축일 : 8월 9일

요한 과르나는 살레르노 출신으로서,
볼로냐에서 공부하던 중에 성 도미니꼬를 만났다.
그들은 서로에게 매력을 느꼈으므로,
요한은 새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219년,
13명의 수도자들이 에트루리아로 선교여행을
떠났을 때, 비록 그가 가장 나이 어렸지만,
그들의 원장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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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John)

축일 : 8월 9일

요한 부팔라리는 움브리아의
까스뗄 뽀르지아노에서 태어났고,
성녀 루치아 아멜리아의 동생이다.
그는 젊어서 세속생활을 떠나, 리에띠에 있던
성 아우구스띠노 은수자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게 엄격한 생활을 한
반면에, 병자와 부랑자들을 도왔고,
또 수도원을 찾는 사람에게 최대한의
환대로 영접한 일로 유명하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관상으로 지냈는데,
그는 자신의 과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시도록 눈물로 기도하곤 하여,
눈물의 은사를 받았다는 평을 들었다.
한번은 그가 정원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동료가 "왜 그렇게 슬피 우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여기있는 수없는
나무와 풀, 꽃 등은 잎을 내고 열매 맺으려
꽃피우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이성을 받았고,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주님의 뜻을 거스리며
아무런 꽃도 열매도 맺지 못하니,
이 아니 슬픈 일입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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