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4,09,09) -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2004. 9. 11. 오후 8: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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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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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고린토 1서 8,1ㄴ-7.11-13
형제 여러분, 사람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는 문제가 나왔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세상에 있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또 하느님은 한분밖에 안 계십니다. 남들은 하느님도 많고 주님도 많아서 소위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이고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형제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때는 그것이 참말로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에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여러분의 그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국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뜨린다면 나는 그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고기를 다시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복음 루가 6,27-38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 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 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제가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은 바로 이메일을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어떤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부푼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메일 박스를 열어봅니다.

‘읽지 않은 메일 72개.’

하지만 그중에서 그리운 이의 이름을 찾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까만 제목을 유심히 쳐다보게 됩니다. 아주 달콤한 말로 저를 유혹하는 제목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당신을 위해 이 글을 씁니다.’,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문의하신 내용입니다.’ 등등의 제목들. 이 제목에 속아서 메일을 열어보면, 이 유혹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깊은 후회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원하지도 않는데 이상한 화면(18세 이하 관람불가의 내용)이 팍팍 뜨거든요.

결국 72개의 메일 중에서 제게 필요한 메일은 단 2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꽤 많은 메일을 받았었는데, 요즘은 홈페이지와 쪽지 그리고 메신저를 통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우리들 삶 가운데에서 편지를 몰아낸 이메일 역시 많이 이용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따라서 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스팸메일을 보면 괜히 화가 나게 됩니다. 그런데 문득 어떤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아마 그때 여러 신부님들과 스팸메일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다들 이 스팸메일이 지겹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세요.

“어차피 다른 메일은 오지도 않는데, 스팸메일이라도 메일함을 채우고 있으면 외롭지 않잖아?”

스팸메일이라도 그 신부님에게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외롭게 느껴지는 빈 메일함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의미 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이해가 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이 그 길을 향해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우리들이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들 역시 또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런 의미 있는 것들을 판단하고 단죄한다는 것은 그 의미들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것이고, 그 결과 하느님의 뜻을 없애는 행동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판하고, 단죄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봅시다.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까요? 나는 그 사람이 정말로 밉고 그 사람이 제발 사라줬으면 하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미 없음으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행하기보다는, 모두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로운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오늘이 되십시오.



이걸로 될까요?

옛날에 어떤 신부님이 밤늦게 공소 미사를 마쳤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상당한 먼 거리에 있는 성당까지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등대불이 켜지는 날도 아니었고 손전등도 없었습니다. 교인인 농부가 신부님의 난처한 처지를 보고 관솔가지로 횃불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이 횃불로 집에 갈 수 있을까 하고 미심쩍어 했습니다.

“이걸로 될까요?”

“집에까지 충분히 가실 수 있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정말 이걸로 될까요?”

“집에까지 충분히 비쳐 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신부님은 미심쩍어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농부는 소나무 관솔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라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농부의 말 그대로였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 1

  • 2004년 9월 11일 오후 8:33

    잠시 일본을 다녀오느라 새벽을 열며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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