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물 캐던 인왕산 -
1960년, 이른 봄이었습니다. 철죽과 진달래 꽃으로 인왕산 계곡이 아름 다웠습니다. 저 산밑의 폭 넓은 개울에 맑은 물이 흐르고 그옆에 차 한 대가 다닐 정도의 흙길인 비포장 도로가 있었습니다.대체적으로 험한 산 그리고 인적이 드물어 임거정등 영화 촬영을 여기서 했답니다. 4.19때 학생들의 은신 처 이며 김신조가 도주하다 이곳에서 최포 되었지요.
인왕산 정상에 올라가 내려다 보면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보입니다. 당시 종로에 있는 화신 백화점이 가장 큰 건물로써 4층 석조 건물 이였죠. 서 울은 남산과 장충동 그리고 인왕산이 서울의 울타리였지요. 아주 작았죠 바위와 바위 사이에 용케도 뿌리를 내리고 자란 진달래가 연한 분홍색을 띈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아름 다웠답니다. 어머니와 저는 나물 캐려 인왕산에 올라 왔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공기 좋아서 산나물은 아주깨끗 하다고 어머니가 얘기 하셨지요. 저는 이곳 저곳 돌아 다니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무 말없이 나물을 뜯으셨습니 다. 그리고 마른 나무가지를 줏어 모아 묶었지요. 동내 시장에서 장작을 사면 되지만 어려운 형편이어서 가끔 산에서 마른 나무를 모아 집으로 갖어오곤 했지요.
가을에 때 맞지 않게 봄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않계시지 만 갑짜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적어 봅니다. 4남매를 낳으시고 우리가 결혼 할때까지 집안이 가난하여 고생을 많이하셨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 음으로 어머니를 그려 보았답니다. 외가에는 농사도 많이지으며 또한 외삼촌들 교육계통에 계셔서 가정 환경은 좋았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어머니가 막내여서 온갖 귀여움을 한몸에 다 받으셨었답니다. 잠만 자 고 일어나면 여러채의 무허가 판자집이 생기는 달동내 였지요. 울타리 가 없어서 오 갈때 이웃과 만나게 되며 언제나 정담을 나누며, 가정 형편을 소상이 알게 되는 그런 동내였지요. 개울따라 걷다가 다리를 건 너면 문화촌 버스 종점이 나타나지요. 오가는이 많었지요. 가로등과 가 계가 많어서 저녁에는 밝았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노점상인이 많았지요 처음 만든 라면을 길 옆에서 끓여 놓고 먹어 보라고 가는 사람 붙들고 권했 었지요. 그리고 연탄을(십구 공탄) 쌓아 놓고서 사다 써 보라구 선전 했었답니다.
|
- 인왕산 이야기 -
2004. 10. 28. 오후 4:11:34
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