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묵상하며 (연중 제 21주간 수요일 복음 8월 25일 )

2004. 8. 25. 오전 8:28:34

1
글자

제1독서 데살로니카 2서 3,6-10.16-18
    형제 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게으른 생활을 하거나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여러분이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는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빵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며 애써 노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우리를 본받게 하려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 하는 말을 여러분에게 종종했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어느 모양으로든지 항상 여러분에게 친히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바오로로부터. 이렇게 친필로 서명을 하며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이 서명은 내 모든 편지를 가려 내는 표입니다. 이것이 내 글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복음 마태오 23,27-32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떠들어 댄다.
    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
오늘의 말씀 - 빠다킹 신부님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인터넷(빠다킹 닷 컴의 상담실 내용이 아닙니다)에 자신의 고민을 올렸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 중1인데요. 일주일에 용돈을 10,000원을 받아요. 근데, 군것질을 하다 보니 돈이 축이 나요. 게다가 전 용돈의 반을 차비로 쓰는데요. 하루에 1,000원, 일주일에 6,000원 들어요. 4,000원으로 써야 하는데…… 지금 돈을 모아야 하거든요. 어떻게 좀 할 수 없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떤 답을 해주겠어요? 기막힌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용돈을 아끼려면 다음 2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안쳐먹기, 걸어가기.”

    맞습니다. 안 먹고, 교통비를 아껴 쓴다면 당연히 용돈을 모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답이지요. 하지만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바로 그 옆에 늘 해결 방안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설마 이런 곳에 길이 있을까?’라는 식으로 단정함으로써 스스로 힘든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순하고 간단한 구원의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복잡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아주 심한 말로 꾸짖고 계시지요.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들은 사소한 규정들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세밀하게 지키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계명은 간과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 중요한 계명은 무엇인가요? 정의를 실천하고 타인에게 자비를 베풂으로써 사랑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 가장 충실한 자녀의 모습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하느님을 흡족하게 해드릴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온 세상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기를 바라시고, 자신의 만족을 찾지 말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설마 하느님께서 그렇게 단순하겠는가?’라고 생각을 했는지, 여러 규정을 만들어서 아주 복잡한 하느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의 관계를 부모와 갓난아기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갓난아기가 그 부모에게 드릴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물질적인 것이 있을까요? 그 부모를 위해서 돈 벌러 나갈까요? 사실 그 갓난아기는 너무나도 힘이 없기에 부모에게 드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갓난아기라고 부모가 혼을 낼까요? 그래서 집에서 나가라고 윽박지를까요? 아니지요. 부모는 아기의 작은 웃음만으로도 큰 만족을 하고요, 시간이 지나 ‘엄마, 아빠’ 소리를 했다면서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기뻐합니다.

    바로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필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갓난아기와 부모의 모습처럼 우리들의 부모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당신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 모습만으로도 우리들에게 그 뜨거운 사랑을 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그 사람이 미워 죽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힘들고 지친 삶이지만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일어나려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하실까요?

    하느님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저 그분의 사랑만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힘차게 살아가면 어떨까요?
오늘의 성인 - 루도비코(Ludovico)
    (1214-1270년) 중세의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찬왕으로 알려진 성 루도비코는 1214년 프 랑스왕 루이 8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두터운 신 심에서 나온 정의와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권리를 옹호하였 다. 쉰 여섯살에 십자군 전쟁에서 병사하였으며 1297년에 시성되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갓난아기의 미소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하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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