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규봉신부(전주교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 지방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회의 설립회원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1534년에 파리 북부에 있는 몽마르트르 성당에서 첫 서원을 하였다. 1537년, 이냐시오와 다른 4명의 회원들과 함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538년에 로마로 파견되었다. 1540년, 예수회가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은 후, 동료와 함께 인도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인도로 파견되었다. 1541년, 인도 중서부의 고아 지방에 도착한 그들은 먼저 병자와 죄수들을 방문하고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전념하며, 그곳의 포르투갈 사람들의 도덕성을 바로세우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 후 남단으로 내려가 어촌의 어부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수천 명을 영세시켰다. 그는 거의 매일 대재를 지키고 가끔 철야기도를 하며 극기와 고행을 하였다. 1545년에 그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지방에 복음을 전하였고, 1546-1547년, 몰루카 제도와 모로타이 섬에 전하였다. 그 후 말라카에서 일본인 ‘사또미 야지로오’라는 일본인을 만나 1549년에 그와 함께 일본에 들어갔다. 그리고 야마구찌에서 그곳의 영주인 오오우찌 요시다까로부터 절간을 기증받아 교회로 사용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1551년에 일본을 떠나 인도에 돌아왔으며, 인도의 첫 번째 예수회 관구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중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라는 중국인 청년과 함께 중국으로 출발하였지만 꽝뚱항(廣東港) 근처에 있는 상치안 섬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항상 하느님께 기도하였으며, 단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마지막으로 바치며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고아 지방으로 이전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부패하지 않고 얼굴이 산 사람과 같다고 한다. 그는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비오 10세에 의하여 포교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과 잠자리를 함께 나누었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특히 나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잠잘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거의 매일 대재를 지키며 가끔 철야기도를 할 정도로 열심했다. 그가 개종시킨 교우 수는 적게 잡아도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고 부르며, ‘동양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인은 이냐시오 성인으로부터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 16,26)라는 말씀을 듣고 이냐시오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 신앙의 반석으로 삼았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반석으로 삼아 신앙인격의 집을 지었기 때문에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사도 바오로처럼 복음을 전하는 데 자신의 온 삶을 바쳤다. 때문에 교회는 그를 포교사업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한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소명은 곧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복음전파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나와 가까운 가족, 자녀, 배우자, 직장 동료 및 친구와 친지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인은 개인적 이익을 포기하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나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