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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제 1독서 : 묵시 20,1-4.11 21,2 (죽은 이들은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는 새 예루
요즘 독서와 복음은 계속해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상 종말은 먼 미래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만이 아니고 성경이 쓰여진 당시인 50년~120년 사이에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종말과도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때 쓰여진 종말론적인 성경, 즉 마태오, 마르코, 루카 특히 요한 묵시록 등은 그 내용들이 한결같이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리스도교는 드러나게 박해를 받기 시작하는데 박해는 처음 유다인들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같은 유다교 신자였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야훼 신앙의 배신자로 보고 핍박하기 시작하였지요. 율법과 관습을 뒤엎으려 하고 감히 거룩한 제도와 성전을 비판했다고 스테파노를 고발한 유다인들은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임으로써 첫 순교자를 만들고 그 때부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 때 박해에 앞장섰던 사람 중의 하나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바오로 사도였지요.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 해가 마무리되는 요즈음 독서와 복음은 계속해서 세상 종말과 심판을 이야기하고 특히 요한 묵시록에는 늙은 악마며 사탄, 용 등 예사롭지 않은 표현들이 등장하여 무시무시한 일들만 일어날 것 같은 공포의 분위기와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절망의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들 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그 날이 구원의 날이라는 확신에 찬 내용이 그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그 날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천상의 예루살렘이 드러나는 날이라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무엇보다도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심과 교만함으로 세상은 더럽혀지고, 자유롭게 생명을 주고받던 모든 관계가 서로 지배하고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관계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소수의 사람들과 나라들의 부와 사치스런 소비를 위하여 절대다수 사람들과 나라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 세상의 모습에서 우리는 심판의 목적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심판은 파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 질서가 지켜지는 곳에서는 심판이 필요 없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권이 존중되고 정의가 자리 잡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펼쳐진 곳에서는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내려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공포가 아무 의미가 없으며 풍요로운 하느님의 은총만이 지속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로 살고자 하면서도 성가정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가정의 흐름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 인간의 욕망대로 끌려가고 있다면 다시 회복시켜야 합니다. 에덴 동산 이후 형제였던 카인과 아벨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형제애와는 정반대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서로를 보호하고 아끼는 대신 해치고 죽게 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교만함을 보이면서 인간의 욕심이 하느님의 뜻과 얼마나 어긋나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지요. 이러한 욕망과 폭력의 사회로 변해버린 이 세상을 우리는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 말씀을 들은 우리가 실행해야 할 과제입니다. 혹시라도 부모 자식 간에 이웃 간에 하느님께서 만들어내신 원래의 모습이 아닌 부정적인 모습이 들어있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심판을 준비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실현되고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에덴 동산이고, 이 세상을 에덴 동산으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절박하고 긴급한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삶의 자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 이기양 신부님
2006. 12. 2. 오후 12: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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