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떠러지를 향하여 전력질주를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명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낭떠러지를 향하는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앞에 뭐가 있는지를 모르는 경우일 것입니다.
"앞에 뭐가 놓여있나?" 하는 궁금증과 확실함은, 달리는 이에게는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치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듯, 선조 수십 대를 다 합쳐놓아도 세상 종말은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낭떠러지를 향하여 '뜀박질'을 하다 비명을 지르는 운명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여기에 대한 이성적 답을 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과학이 말하는 추론들도 가능성에 관한 것이며, 현자들의 가르침도 합리적 검증과정을 밟게 되면 추상적일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 끝'에 대한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믿음과 신뢰의 영역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수용자 입장이 '세상 끝'에 대한 결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을 알아라"(마르 13,29).
성서가 말하는 '종말'은 오로지 '하느님이 오실 때'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묵시문학적 표현들도 그 세세한 기록의 중심은 단지 '하느님이 마음 먹은 때'로 수렴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세상 종말은 '시간적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이 '오늘'일 수도 '내일'일 수도 있는 것이 세상 종말인 것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오늘' 혹은 '내일로' 받아들인다면 그때가 이미 세상 종말을 앞당겨 맞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교회가, 주님 오심을 고대하는 '종말론적 교회'라고 늘 말하는 것은 이해될 만한 일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으로부터 선민들을 모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하실 일은 바로 이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본래 이 구절은 신명기 30장 3~4절과 즈가리야 예언서 2장 10절과 상통하는 맥이라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구약에서 주님 말씀에 귀기울지 않아 흩어졌던 백성을 다시 모으리라는 예고의 한 장면을, 주님은 종말에 이루실 당신의 일이라고 예고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이 일을 위해서 왔고, 당신 제자들을 이 일을 위하여 파견하셨다는 점은 그리스도교의 초보자라도 쉬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 점에서 여러분이 오늘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가오심'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바로 이것이 '자신의 종말'을 준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과 생각으로서만 아니라,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좇아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신앙인의 행동이 주님 때문에 이루어지는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구체화시켜 볼까요?
1968년부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이어 받은 한국교회는 '평신도사도직협의회'를 구성하고 1년에 하루이지만 '평신도주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 큰 발전입니다. 그렇다고 없었던 생각이 하루 아침에 혁명적 전환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일 것입니다. 본당 공동체에도 평신도의 역할과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만족할 일은 아닙니다. 평신도에 대한 재발견은 '역할과 기능'이 아니라 존재론적 재발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람과 같은 성령이 부는 대로' 그리고 그 성령의 도움을 받은 우리의 평신도들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귀기울이고 순명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얻은 소중한 지혜들을 교회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더 문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들 소리를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목소리로서 만'이 아니라, 주님의 종말을 함께 사는 '형제의 소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종말을 향해가는 교회 모습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