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제1독서에서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 다니엘은 최후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하느님을 잘 섬기던 조상들은 마치 수난 받는 종과 같은 고난을 당하였지만(이사 53장 참조) 현명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생명의 책에 기록될 것이고 (다니 12,1; 탈출 32,32-33; 루카 10,20), 최후의 날에는 그들이 정의로 이끈 이들(정의의 스승들)이라 불릴 것이며, 땅 먼지 속에 잠들고 있었다 할지라도 미카엘 대천사의 말을 듣고 일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예언합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37,1-14)과 더불어 둘째 마카베오(2마카 7,9)가 증언한 것처럼 죽은 이들(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다니 12,2). 생명의 책에 기록된 정의의 스승들, 즉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들은 하늘에서 빛나는 별처럼 살아갈 것이고, 부끄럽게 살아온 이들은 수치와 치욕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부활사상이 아직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니엘 예언자는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심판은 하느님의 일방적인 판단이 아니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제2 독서는 지난주에 이어서 구약의 대사제와 신약의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제사를 비교합니다. 스스로 정의의 스승들이라 부르던 구약시대의 사제들이 제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렸어도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길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죄를 없애실 뿐만 아니라 죄 값을 영원히 묻지 않으실 신약의 대사제로 당신의 아드님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제2 독서 역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하느님의 보편적이며 결정적인 구원의지를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종말론적 표징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 예수님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철딱서니들을 향해 최후의 심판이라는 이름으로 경고하십니다. 주님의 날에 일어날 현상들에 대한 요엘 예언자의 예언(요엘 2,10)으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은 다니엘 예언자의 예언(다니 7,13)을 인용하면서 사람의 아들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천사들을 보내어 온 세상에(사방으로) 흩어진 이들을(즈카 2,10 참조) 모아들일 것이라고 합니다(신명 30,4 참조). 사람의 아들이 사방에서 모아들일 이들은 결국 하느님 아버지께서 모아들이시는 것이며, 요엘이나 다니엘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을 받을 사람들을 말한다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이들(박해)로 인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암시합니다. 심판의 날에 대한 이 말씀은 70년대 유다인들의 전쟁과 무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이들의 박해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런 환란들 속에서 신앙인으로서 갖춰야 할 태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날이 갑자기,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마르 9,1)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언제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마치 무화과 나뭇잎이 돋아나면 봄이 왔고, 즉시 여름이 온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도 최후의 날이 다가올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에 와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문을 두드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묵시 3,20 참조). 구름을 타고 오실 사람의 아들이란 세상을 심판할(요한 12,31) 빛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 어우러지지 않습니다. 어둠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비춰주시는 빛 속을 걸어가는 이들은 그 빛을 믿고 자신 있게 걸어갈 수 있고, 빛의 자녀가 됩니다(요한 12,35-36). 예언자 다니엘과 히브리서의 저자는 물론이요, 예수님까지도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이 이완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이라는 표현으로 안타까움과 걱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앞설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최후의 심판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빛이신 사람의 아들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에게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2티모 3,15)를 인간에게 줍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를 파괴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을 거니는 이들에게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2티모 3,16) 심판의 잣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불과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기”(예레 23,29)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우리 입과 마음에 있습니다(신명 30,14; 로마 10,8). 그러므로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시대의 징표를 얼른 깨달을 수 있고,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대적 징표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깨어있는 삶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교회는 개혁이라는 방법을 늘 허용했습니다. 개혁의 외적인 표시로 흰색 옷을 입기도 했습니다. 동, 서방 교회 모두가 흰색으로 치장하면서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께로 향하는 열정을 표현했었기 때문입니다. 개혁의 내적인 의미는 하느님께서 지금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 잘 깨달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스럽게 보이는 세상 밖으로 도망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라는 빛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라는 희망적인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머무르는 곳에서 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하도록 가르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지내는 평신도 주일의 의미입니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거나 변화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은 빛으로부터 멀어질 것이고, 어둠속을 걸어가야 하는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한다면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 때문에 두려움으로 살아가지 않고 오히려 생명의 책에 기록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하느님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를 쓴다면 하느님의 심판이란 우리를 저주하시고 흩어버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 곁으로 모아들이시려는 것이라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
[강론] 연중 33주일 - 방효익 신부님
2006. 12. 1. 오후 11:4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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