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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부활 제 5 주간 수요일. 2007. 5. 9. 토평동.
사도 15, 1-6. 요한 15, 1-8.
요즘 아이들의 폭력성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을 분석해보면 모두 유년기와 소년기의 성장환경에서 애정결핍, 불안정 등 심리적 문제가 크게 영향을 주어 공격적 행위를 표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더 잘 받았다면 그런 일들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김순구교수(대구보건대 간호학과 교수)는 부모가 애정 표현을 좀더 자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생후 18개월까지는 피부접촉을 제대로 받아야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부모와 애착형성이 잘 된다. 피부가 서로 닿으면서 신경계를 자극해 신경전달물질인 아드레날린과 세로토닌의 분비가 증가하여 두뇌발달을 촉진하여주고, ‘애정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뇌가 알파파를 폭발적으로 생성하므로 근육이 이완되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의식이 집중되고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김순구 교수)
어찌 이것이 아이들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이고, 그렇기 때문에 요즘 세계적으로는 ‘프리허그’(Free-Hugs : 무료로 안아주기)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안아주는 것은 기분전환을 통해 외로움을 없애주고 즐거움과 안정감을 줍니다. 그래서 미국의 심리상담자인 캐서린 키팅은 ‘포옹은 단순히 껴안는 행위를 넘어 치유의 과학이며 인생의 예술’이라고 극찬까지 했습니다.
이런 운동은 우리 성당에서도 펼치면 어떨까요? 저도 미사 시간이면 평화의 인사를 좀더 활기 있게 하자고, 안아주는 건 어떠냐고 주장했지만, 혼자는 늘 역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것은 더디더라도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조금씩이라도 성당에서 서로를 위해 안아주기 운동을 하면 좋겠죠? 우리에겐 평화의 인사라는 좋은 장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도 사람들을 치유할 때, 꼭 스킨쉽을 하셨습니다. 저는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거나, 구원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하는 병자들을 대할 때, 예수께서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셨으리란 생각을 합니다. 치유의 권능은 말씀으로부터 나오나, 당신의 그 마음은 가슴으로 전달해 주셨을 거란 생각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은 포도나무요, 하느님 아버지는 농부, 그리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십니다. 농부는 포도나무를 사랑합니다. 열매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분은 결과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좋게 보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기에, 농부이신 하느님은 가지치기를 과감하게 하십니다. 당신은 예수라는 포도나무가 얼마나 좋은 나무인지 아십니다.
농부의 마음을 아는 나무 예수는 모든 양분을 한껏 끌어 가지에 전달합니다. 자신의 가지가 쳐지는 아픔 속에서도 나무 예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줍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치시려는 주인에게 ‘제게 일 년만 주십시오’라고 애원하는 목소리, 그것이 바로 나무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껴안고 당신을 전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얘들아-My children”(요한 13, 33)라고 부르시는 예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품에서 놓지 않으시고, 애정 호르몬이 팍팍 생기게 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분은 아무리 주셔도 내가 받지 않는다면, 그 가지는 잘려져 나갈 것입니다.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물러라. 우리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당신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 사랑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지금도 손을 벌리고 나를 안아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품에 안겨야 하고, 그분 사랑을 부지런히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삶입니다. .....................
예전 강론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기에 그것도 함께 올립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이별의 말씀으로 하고 계시는 15장의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지면서, 강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부분입니다. 머무를 것인가? 떠나갈 것인가? 이 문제는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라는 명백한 문제와 같은데, 마치도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는 것과, 나무가 뿌리가 뽑히면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포도나무가 생명의 근원을 의미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포도나무 이야기를 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을 떠나면 죽는 것과 같다’라는 것을 금새 그리고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며 그동안 당신과 함께 한 시간에 대해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 3)
이미 잘 가꾸어졌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보여줄 것을 다 보여주시고, 하실 수 있는 정성을 다 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즉 예수님과 함께 한 세월 속에서 이미 그 말씀과 행적을 통해 잘 가꾸어진 가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들여서 뒷바라지를 했는데,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하는 명백한 과제 앞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을 잘 살아야겠다라는 다짐을 하면서도 삶이 쉽지 않은 우리에게 더 다가오는 구절은 바로 2절의 말씀입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 2)
가지를 쳐내고(아이레인), 손질하고(카타이레인). 똑같이 잘라내지는 행위이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당신을 따르지 않는 삶이야 이미 말씀하셨듯이 죽는 것과 같습니다. 다 잘라 쳐내시고 불에 처넣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다음 구절, 열매를 잘 맺는 나무 역시 손질이 된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바짝 잘라 가지치기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바짝 잘라진 가지는 깨끗하게 되어 포도나무인 예수님의 생명을 더 잘 받아들여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시련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내 삶을 조화로 만들면 안 되겠지요. 화려함만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물론 잡벌레가 끼지 않겠지만, 그것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아무런 시련도 걱정도 유혹도 없는 삶을 바란다면 그것은 열매를 바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죠.
내 안에 머물러라. 떠나지 말라. 머무르면서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라.”(요한 15, 7) 머물면서! 그렇습니다. 그 분 안에 머물지도 않고 청할 수는 없죠.
그리스도의 것은 원래 잘 먹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쏙쏙 피를 빨아먹고, 몸을 잘 씹어 먹어야 합니다.(표현이 그렇지만) 죄송하다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먹고서도 먹지 않은 것처럼 발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의 것을 먹었으면 먹은 티를 내야 하는데, 그분을 먹었다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둑이죠.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 5)
나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 없이 아무것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내 삶은 예수 없이도 잘 이루어지는 삶인지,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하는, 함께 하고 있는 삶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
5월 9일 수요일 ..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조성호 신부님
2007. 5. 11. 오후 9: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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