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2천 년 전 무서움에 떨며 좁은 골방에 모여 있는 주님의 제자들은 귀신처럼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이여 돌아가신 주님만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난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러하기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오직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나약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다정한 목소리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시며 죽음을 이기신 당신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여주며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그들 마음에 심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모임이던지 항상 늦는 사람이 있는 법, 제자들의 무리에도 목수의 직업에 걸맞게 모든 것을 합리적이고 정확한 계산에 의해 생활하였던 토마스는 늦게야 도착하였고, 동료들이 주님을 보았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증거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그 모든 것을 듣기라도 하셨던 것처럼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시며,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천 년 전 조그만 골방에서 당신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던 제자 토마스에게 하신 이 말씀은, 동시에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여 모든 것이 우리들의 이성에 명확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또 다른 합리주의 사고에 물들어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옛날에 한 사람이 그의 친구를 찾아가서 자신의 아내가 그림을 그리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도대체 한 번도 멋진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고 하며, 그에게는 모두가 다 물감을 범벅해서 아무렇게나 쳐 발라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눈이 아파서 안과 의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는 안과의사에게 “선생님 원시인지 근시인지 모르지만 눈이 아파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제 눈을 진찰해 보시고 저에게 알맞은 안경을 하나 쓰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의사는 시력검사를 한 후에 그의 눈에 잘 맞는 안경을 하나 맞추어 주었다. 그는 사물을 똑똑하게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 때서야 그는 자기 아내의 그림이 왜 그처럼 형편없이 보였는지를 깨닫고 아내를 위하여 화실을 마련하고 그곳에 아내가 그린 아름다운 그림을 가득 걸어 놓았다. 그가 안경을 쓰고 똑똑히 보니 아내의 그림이야말로 훌륭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사고 또한 이미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로 바뀌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하기에 현세적인 잣대로 신앙을 재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고 모두가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되는 것도 아닌 것이며, 또한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완벽하게 이해되는 것도 아닌 신비인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지성의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고 하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만 행동하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믿음의 안경을 사서 써라”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신앙은 믿음의 안경을 통해서만이 이해되고 우리들의 마음에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볼 때에는 도처에서 그분의 사랑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우리들은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죽고 주님 안에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누구보다도, 또한 다른 종파의 신도들보다도 그분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들은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마냥, 믿음의 시력이 약한 근시안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분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며 본받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주님께 살려 달라고 종일 외치고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그분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 토마스 사도 마냥 우리 마음의 불안을 없애 줄 뚜렷한 증거만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우리들의 마음에는 그분을 우리들의 왕좌에 앉히기에는 우리들 자신이 너무나도 교만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부활한 주님의 모습보다도 아직도 우리들의 마음에는 수난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그리고 아직도 어둠의 무덤에 누워 계신 주님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에는 희망의 밝은 빛이 없고 믿음에는 싹이 트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또 다시 우리들에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시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들은 신앙에 있어서 우유를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미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주님을 믿겠다고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며, 세상의 여러 유혹을 버리고 과감하게 새로운 길, 신앙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죽음을 이기신 부활한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러하기에 토마스 사도처럼 부활의 증거를 요구할 단계가 아니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신앙을 고백할 단계에 놓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요구하는 단계가 아니라, 바로 그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단계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 믿음을 보여주는 단계에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부활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때만이, 우리들은 많은 기적을 행하신 사도들처럼, 고통에 찌든 이웃들의 얼굴에 웃음이 띠게 하는 생기를 줄 수가 있는 도구가 될 수가 있으며, 성난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우정을 나눌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코 누구에게도 속지 않는다고 합니다. 믿음 그 자체이신 분이 바로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간직한 사람은 누가 속이고 있는 것인지를 바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든지 확실히 믿기만 한다면 결코 속지 않습니다. 속았다면 상대가 속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그 사람에 대한 의심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가졌던 조그마한 의혹이 바로 자신을 속게 만들은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간직한 사람은 밝은 빛 아래서 상대를 보는 사람이요, 의혹의 눈을 간직한 사람은 이웃을 항상 어두운 안개에 덮어두고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겠습니까?
우리 다 같이 부족했던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 주님께 용서 청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안약과 믿음의 안경을 달라고 청합시다. 사도 요한이 주님의 날 파트모스 섬에서 보았듯이 믿음의 눈을 간직한 사람만이 주님의 참된 모습을, 대사제이시고 우리들의 심판자이며 동시에 보호자이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쁨에 넘쳐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확고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십자가에 못박이여 돌아가신 주님이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우리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시고 계심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도록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들의 확고한 믿음을 주님께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어둠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주위의 죽음의 어두움을, 이기주의와 불신 그리고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있는 우리들의 생활 모습을 바꿀 수 있을 때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입니다. 우리들은 아직도 주님께 증거를 청해야 할 그런 단계가 아니라 주님의 참된 모습을 이웃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성숙한 신앙인들입니다. 희랍신화에 오페우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뱃사람들이 향해할 때 어떤 섬에 접근하면 아름다운 요정들의 노래가 들렸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황홀해져서 그 섬을 향하여 배를 몰다가 암초에 부딪쳐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 비극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오페우스 신상을 뱃머리에 달았습니다. 요정의 노래가 시작되면 음악의 신(神)인 오페우스의 노래가 시작되는데 그 노래가 요정의 노래보다 아름답고 우렁차서 선원들이 죽음의 유혹에 걸려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신화는 유혹이나 시련을 두려워하거나 피할 것이 아니라 더 우렁차고, 더 아름다운 노래로 유혹과 시련을 극복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이 미사 중에 주님께 우리들의 믿음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우리들의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청합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 이 미사 중에 힘차게 성가를 부르며 열심히 기도하고 미사에 참석하며 유혹과 시련의 노래가 우리 귀에 들리지 않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은 이러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 이 미사 중에서도 “나를 보지 않고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한 너희들은 참으로 행복하다”(요한 20,29) 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멘. |
4월 15일 일요일 .. 부활 제2주일 - 민병섭 신부님
2007. 4. 16. 오전 9: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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