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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 제2주일 C해-00)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요한 20, 19)
어느새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왔습니다. 따뜻한 봄과 함께 찾아온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류에게 새 생명의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만일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을 것이며, 끝없는 죽음만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사람이 한 세상을 살다가 죽음 그 자체로 끝나버린다면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부활이 있고 그 부활을 통해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의 삶을 가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부활절에 들려주는 성경말씀을 모두가 예수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해 주고, 또 그 부활사건을 믿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마음의 평화"를 주셨는데 그 자리에는 도마 사도만은 없었다고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도마사도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도마 사도는 그 사실을 믿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셔서 부활의 사실을 입증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도마 사도를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도마 사도는 직접 예수님께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 그 동료 사도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바로 도마 사도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이나 또는 그들의 후계자들이신 주교님들을 통해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시대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 보지 못하고 믿어야하는 조건에 처해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보겠습니다.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본적도 없지만, 바로 그 제자들의 증언에 우리의 신앙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온 세상에 나가 전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확실성을 찾는 것입니다.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교회를 통해 내려오는 신앙고백 속에 우리의 신앙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간구합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아버지께로 떠나시면서, 그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동시에, 그 제자들의 말을 듣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부활에 대한 신앙도 역시 그 제자들이 전해준 신앙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예화) 요셉 랕씡어 추기경은 「그리스도 신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 「믿는 사람이 無와 試練과 疑惑의 바다 위에서만 믿을 수 있고 불안한 바다만이 믿음의 유일한 자리로 그에게 주어졌다면, 그 반면에 믿지 않는 사람 역시 단순한 不信者로서만 非辨證法的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신자가 끊임없이 불신의 위협을 받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신자에게는 신앙이 그의 폐쇄된 세계를 유혹하고 위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 존재의 딜레마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앙의 불안에서 도피하려는 사람도 신앙이 진실이 아니라는 단언을 끝내 내릴 수 없는 불신의 불안을 맛보게 됩니다. 신앙거부에서 비로소 불가능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르틴 부우버 (Martin Buber)의 유대전설을 소개하며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 『하루는 어느 해박한 계몽주의자가 베르디체에베의 명성을 듣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평소와 같이 논쟁을 벌여 자기 신앙이 옳다고 내세울 그의 뒤진 논거를 가차없이 갈파할 속셈이었습니다. 사제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가 「그렇지만 혹시 옳을지도 모르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차분한 말로 「이 사람아, 자네와 함께 말씨름을 한 율법대가들의 말도 자네에게는 모두 허사였네. 자네는 헤어질 때마다 그들의 말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나. 자네에게는 그들도 하느님과 그의 나라를 여기 있소하고 대령할 수 없었고, 나도 그렇게 할 재간은 없네. 그렇더라도 좀더 생각을 해보게. 이 사람아 혹시 옳을 지도 모르니까」하였습니다. 그러자 啓蒙主義者는 맞서보려고 속으로 안간힘을 다해 보았으나 매번 그 「혹시」라는 무서운 말에 부딪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혹시」라는 말은 불신도 회피할 수 없는 시련이며 불신도 이 말 안에서는 신앙거부의 불가능성을 체험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자기 존재의 진실을 감추지 않는다면 사람은 누구나 제나름대로의 의혹과 「더불어」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무도 그 의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그 아무도 믿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는 의혹을 「무릅쓰고」 믿음이 있으며 불신자에게는 의혹을 「통해서」 그리고 의혹이라는 「형태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자기 현존재의 궁극적 의의를 이렇게 의혹과 믿음, 시련과 확신의 그칠 줄 모르는 대항 가운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 인간운명의 기본 형태인 것입니다. 그렇기 대문에 신자와 불신자 양자를 각각 혼자서 폐쇄되지 못하게 하는 이 懷疑야말로 아마 相通의 터전이 될 듯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疑惑이 양자를 안으로 아주 오므라들지 못하게 하며 信者는 不信者를 향하고, 不信者는 信者를 향하도록 길을 터주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는 불신자의 운명에 참여하는 길이 되어주고 불신자에게는 신앙이 회피치 못할 挑戰이라는 양상을 취하게끔 해 주는 것이 懷疑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 철학, 종교 경전들은 그 나름대로 貫通하는 眞理가 내포하고 있음을 봅니다. 또한 동시에, 어느 분야에서든지 피차에 충돌하는 矛盾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종교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하는 말을 들을 때에는 거기에 수긍하면서, 또한 동시에 반종교적인 이론을 들을 때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종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 속에도 모순이 있고, 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이론 속에도 모순이 있고, 종교 사상가와 반종교 사상가 사이에도 모순이 보여집니다. 이 세상은 진리의 방향에서 보면 진리로 채워져 있고, 모순의 방향에서 보면 다시 모순으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섭리, 신비 앞에서 인간은 결코 좁은 사리판단이나 혹은 합리주의의 노예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각자 자신 안에 간직할 수 있는 신앙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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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 제2주일 C해-00)/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김웅태 신부님
2007. 4. 16. 오전 9: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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