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理性)을 초월한 신앙
- 수원교구 정진성(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보아서 이해가 되어야만 믿는 존재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이성적인 인물인 토마 사도를 만나볼 수 있다. 3년간 굳게 믿고 따랐던 분, 영원한 구원과 자비하신 하느님을 전해주셨던 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기적들을 행하신 분이 돌아가신 것도 믿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라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더 이상 희망도, 용기도 없었던 토마 사도의 마음을 우리도 너무나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토마 사도의 모습을 ‘불신앙의 대표’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 모두는 불신앙인 아닌가?
인간적인, 그리고 이성적인 시각에서 토마 사도를 살펴보면 그의 행동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는 부활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신비’는 ‘상식’이 되기 때문이다. 토마 사도는 인간 이성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신비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아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토마 사도는 직접 주님을 뵙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면 어찌하겠는가? 혹시 다른 제자들을 미쳤다고 비웃지는 않을까?
여기서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토마 사도의 이러한 언행 때문에 그의 이성이 신앙 안에서 붕괴되어졌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한 그의 언행이 주님을 뵌 뒤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확신에 찬 신앙 고백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의 어리석음이 깨어지면서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신앙으로 변화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고 또한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확실하고 충격적인 체험을 통한 신앙,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기적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들. 하지만 주님은 항상 우리를 초월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성과 체험을 통한 신앙 보다는 보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행복을 원하고 계시다. 보고 믿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보고 믿는 것도 좋지만 주님을 직접 보지 않고서도 “저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즉 우리의 이성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성의 공백이 아닌 신앙 안에 이성적 삶의 변화이다. 주님의 말씀과 애덕의 삶에 우리의 이성이 전적인 동의를 한다면 우리 삶 속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확실한 충격을 주실 것이다. 그 충격은 말로 할 수 없는 행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