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7. 4. 16. 오전 9:00:01

글자
오늘 제1 독서(사도 5,12-16)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에게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음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그늘에 앉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라고 하듯이(아가 2,3; 애가 4,20)
주님의 도우심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베드로 사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초기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기에 놀라울 뿐입니다.

오늘 제2 독서(묵시 1,9-11ㄴ.12-13.17-19)는
요한이라는 묵시록의 저자가
파트모스 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실을 아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날,
즉 초기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였던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을
구약성경의 전통에 따라서 설명하고 있습니다(탈출 19,16; 히브 12,19).
요한이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박해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있는 일곱 교회(모든 교회)에 써 보내라는 것입니다.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다는 것은
일곱 교회(모든 교회)가
박해 가운데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꿋꿋하게 살아있으면서 하느님께 충실한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교회가 박해를 이겨낼 수 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보살피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셨다는 것은(다니 10,5)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며 대사제이심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들려주신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확인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신앙을 강화시키기 위한
묵시록의 저자 요한의 영적 체험을 설명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요한20,19-31)은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첫째 부분(20,19-23)은
부활하신 날 아침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마르 14,50)이 모여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당신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심이야말로
예수님의 대단한 자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문을 잠가놓고 있었음에도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문을 뚫고 통과하여 들어오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단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고,
주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이미 제자들에게 주셨던 평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평화(요한 14,27)이며,
승리한 메시아, 즉 “평화의 군왕”(이사 9,5; 미카 5,4)이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공동체와 함께 하지 않았던 토마스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손과 피와 물이 나왔던 옆구리(요한 19,34)를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죽으셨던 분이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살아계셨을 때에 하셨던 당신의 말씀,
즉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살아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19)라고
하신 말씀을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성령을 불어넣어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이 누구신가를 다시 확인시켜주시는 것이며(요한 1,32-33),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도록 성령을 불어넣으시는 것이고(요한 3,3-8),
동시에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숨결(성령)에 달려있는 존재임을 확인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그늘을 만들어주실 것이며,
예수님의 협조자로서 우리를 비춰주실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20,24-29) 첫째 부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소생을 이야기하실 때 별안간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갑시다.”(요한 11,16) 하고 동료들에게 말할 정도로
엉뚱했던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머물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말해주었지만
원래 엉뚱한 토마스를 설득시키기가 쉽지 않았나봅니다.
토마스는 살아나신 분을 직접 뵙고,
못 자국을 확인하기 전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빈 무덤을 보고 믿었던 제자(요한 20,8)와
두 손과 옆구리를 보고 주님을 믿고 기뻐했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토마스의 불신은 대단한 표징을 통해 보여주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단호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토마스의 의심은 나타나엘의 의심과 비슷합니다.
필립보가 예수님을 가리키며 메시아라고 했을 때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했으나
예수님께서 자기를 알아보시자
그 때서야 예수님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한 1,49)라고 고백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첫 만남과
마지막 만남에서 빚어질 당신께 대한 의심을 미리 내다보셨던 것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단순히 당신께 대한 불신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증언에 대한 신뢰심을 키울 것을 강조하십니다.
불과 잠시 전에 10명의 제자들이
토마스를 설득시키려고 진땀을 흘렸던 사실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토마스의 신앙고백은
나타나엘이 외쳤던 것처럼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요한 11,21; 시편 35,23; 호세 2,25).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보지도 않고
제자들의 증언만을 듣고 믿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위로해주십니다.

셋째 부분(20,30-31)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으로서 복음의 결론이며,
동시에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분을 믿지 않았던 유다인들의 불신(요한 12,12,37)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성경을 기록했음을 말합니다.
초기교회 사도들과 예수님을 목격했던 증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선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해내면서(요한 14,26)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공동체는 자기들 나름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기억해내면서 기록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 예루살렘 주민들은
“메시아가 오시더라도 저분께서 일으키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일으키시겠는가?
하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요한 7,31)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과 목격증인들은 그 많은 표징보다 더 확실한 표징,
즉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실 정도의 표징 이외에도
수많은 표징이 있었으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구전으로 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계신 예수님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요한 6,68-69).

예수님의 부활은
생물적 법칙에 맞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이구동성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분이 부활하시어 발현하셨다고 합니다.
이틀 전에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했음에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또 알아본 뒤에도 생소했던 것입니다.
오직 부활하신 그분께서
보도록 해주시는 경우에만 부활하신 분이 보이고,
오직 그분께서 눈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셔야만
우리가 그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들은 부활하신 분과 제자들의 만남을 어정쩡하게,
때로는 말더듬이처럼 모순된 말을 하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접촉과 비접촉,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동시에 나타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의 전적인 동일성이 표현되면서도
전적으로 같지 않음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아보면서도 못 알아보며,
그분을 만지지만 건드릴 수 없는 분으로,
즉 예수님의 부활에 관하여  매우 모순된 변증법을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나 이런 모습이 일치하고 하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역설이 드러나고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부활 이야기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올 수 있느냐의 차원을 벗어나,
살아 있는 자가 자신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을 죽인 자만이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삶에서 인간은
드디어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삶의 지평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부활입니다.
인간만이 부활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살아있으면서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남을 위하여 자신을 죽이는 삶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삶이 부활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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