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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2007년 4월 15일
요한 20, 19-31; 사도 5, 12-26; 묵시 1,9-11,12-13,17-19.
오늘 복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고 그들을 파견하셨습니다. 복음서는 그것이 안식일 다음 날 저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오늘의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제자들은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하신 일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나누신 이별의 식사를 기억하고 성찬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말씀의 전례에서 만나고, 그 말씀과 실천이 우리 안에도 살아 있게 하려고 그분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그분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십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같은 장소에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후면 일주일 후를 뜻합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주일의 같은 집회에서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은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본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은 발현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뜻에 맡겨진 용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불어넣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면서 성령을 주신 것으로 복음이 말하는 것은 창세기 2장(7절)에서 얻은 발상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진흙을 빚어 사람의 모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으셔서 제자들이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다는 말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않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용서를 믿고 선포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묵시록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예수님에게서 삶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옛날 유럽 중세 교회가 과제로 안고 있던 문제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중세 초기에 유럽으로 유입되어 정착한 게르만족은 난폭하고 그들의 부족 수령에게만 무조건 순종하는 종족이었습니다. 그들 각자는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줄도 모르거니와 죄의식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부족의 수령이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교회가 도입한 것이 개인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 제도였습니다. 신앙인은 각자 자기의 잘못을 성찰하여 죄를 찾아내고, 본당 신부에게 와서 그 죄를 고백하는 제도입니다. 고백한 사람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신부의 선포를 듣고, 보속을 받아 행합니다. 보속을 주는 것은 죄인이라고 깨달은 사람이 용서를 얻기 위해 난폭하게 과도한 보속을 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성사가 오늘도 존속하기에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죄를 용서해주지 않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고해를 듣는 신부의 임의에 맡겨진 용서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시대적 여건에서 발생한 개인고백 고해성사를 아직도 강요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입니다.
한 시대에 필요하였던 법을 다른 시대에도 강요하면 엉뚱한 해석이 나타납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는 고해성사가 하느님이 용서하시지 않기에 궁여지책으로 교회가 마련한 고해성사인 양 오늘은 엉뚱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죄인을 버린다고 주장하는 유대교 앞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의 자비를 은폐한다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비하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은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후 100 년경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세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믿고 그분의 삶을 실천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였어도,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그분에 대해 가르치고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지키신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자녀 되어 살고 싶은 사람은 그분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통달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해 배워서 하느님의 일인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신 성령을 받아 이웃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르 10,43)는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자비와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 안에 항상 있었습니다.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하느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그 일을 실천하다가 당신 아버지에게로 가셨습니다. ◆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강론] 부활 제2주일 2007년 4월 15일 - 서 공석 신부님
2007. 4. 16. 오전 8: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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