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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오늘은 부활 8일 축제의 마지막 날이며 부활 제 2주일이고 , 교회가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정한 날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항구하게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를 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대목이고, 둘째 부분은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셔서 처음에 자리에 없던 토마와 나누시는 대화입니다. 성전에 의하면, 예수께서 처형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그 이층 다락방에 함께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곧 줄행랑을 놓았었지요. 자기들도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 참으로 약한 존재이지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어놓겠다던 베드로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를 맏형으로 제자들은 공포에 떨면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함께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미 부활하셔서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문이 잠겨 있었지만 아무 거침없이 그 방에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바로 못 박히시고 창으로 찔렸던 당신이시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자상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을 다시 뵌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눈으로 보고 믿게 된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다시 그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첫 번째 평화가 당시 유대인들이 만날 때 늘 하는 인사말이었다면 이 두 번째 평화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화,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인 평화가 그들에게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축복에 이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보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바로 세상 한가운데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두려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방안에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숨, 당신의 영이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권한, 용서하는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그 사람의 아들의 권한을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이루는 공동체인 교회에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하이라이트는 예수님께서 토마와 나누는 대화인 둘째 부분입니다. 토마는 처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듣고는 말하지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어쩌면 그렇게도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똑 같습니까? 무엇이든지 눈으로 확인하거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결코 믿을 수 없다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서의 다른 대목을 통해 토마가 용기와 열정을 지닌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까운 친구였던 라자로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자, 그에게로 갑시다.”라고 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머뭇거렸지만 토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로 갑시다.”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지녔던 토마가 처음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명확한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그는 막상 정말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처형을 당하시자 슬픔으로 미어지는 가슴을 추수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큰소리쳤었지만 그도 다른 제자들처럼 줄행랑을 놓았었지요. 다른 제자들에게 면목도 없고 하여 슬픔을 혼자 감내하리라고 생각하며 혼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두렵고 외로워 혼자 있을 수 없었기에 제자들에게 돌아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을 전해 줍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회의론자인 그는 자기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단언합니다. 그런데, 여드레 후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시고 토마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대가 말한 대로 해보시오. 그리고 믿으시오.” 주님을 뵌 토마는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토마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음미해야 할 교훈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토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떨어져서 홀로 있게 되면 우리도 그분의 현존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내하기 어려운 커다란 고통이나 슬픔을 맞이할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고통과 슬픔을 나누기보다는 혼자서 자기 자신 안에 갇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런 때가 바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슬픔을 당할 때 다른 사람들, 특히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겸허함과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슬픔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토마가 회의론자였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적어도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란 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지니게 된 믿음을 예외로 한다면, 아마도 그런 믿음은 거짓 포장된 믿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는 회의하면서 받아들이고 믿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믿음을 지니게 되고 그 믿음을 깊여가는 것이지요. 어쩌면 정직하게 의심하는 과정을 거쳐 참으로 믿게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할 수 있지요. 그러나 모든 것을 우리의 이성으로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토마의 그 정직성은 우리가 높이 사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토마에게 배워야 할 것은 자기가 눈으로 보고 믿게 된 다음에 철저하게 투신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주님을 뵙자 그분께 다가가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실로 온 몸과 마음으로 주님, 당신은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저의 모든 것이라는 전적인 신뢰로서 드린 투신이고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도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숱한 의심과 회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은총을 체험할 때 우리도 그분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 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대는 나를 보고야 믿는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토마에 대한 질책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에 대한 격려입니다. 오늘 그분이 주시는 격려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합시다. 믿음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2007.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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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류해욱신부님] 2007.04.15
2007. 4. 16. 오전 9: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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