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음 : 마태 26, 14-25 평화방송애청자 여러분! 오늘 하루는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셨습니까? 혹시 어제의 실수나 잘못으로 말미암아 그 시작이 무거웁지는 않으신지요?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굳게 다져 보지만 계속해서 반복되어지는 잘못으로 늘 마음이 어둡다고 여기시는 것은 않으시는지요? 그리고 부활 판공성사의 중압감이나 혹은 사순절에 결심했던 희생이나 보속의 지리 부진함으로 자학하거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는 하루의 시작은 아닙니까?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겪고있는 이런 문제를 한번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전 사정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유다스의 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여기서 유다스는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설령 우리가 그 유다스는 아니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던 베드로가 하루밤 사이에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난 뒤 그러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숨어서 처량하게 울었던 그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 애청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은 그 누구의 배반이나 모함으로 잡혀서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들의 이런 이중적인 마음으로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마치 유다스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 비싼 향유를 아까워 한 것이 아닌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본 모습을 알아서라기보다는 그저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보여 주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 화려한 환영식을 기억 할 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자신의 옷을 벗어 길에 깔아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자신의 주님이라고 오직 당신만을 죽을 때까지 따르겠노라고 목이 터져라 고함 지르며 고백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며칠 후 재판장에 끌려가 재판 받는 그리스도에게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고함치던 바로 그 우리의 이중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은 성주간의 독서의 내용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보여주신 그 대속물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찍부터 그를 택하시어 우리 인간의 인생 길을 밝혀 보여 주시는 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는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않으시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어 모든 이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택하여 세우신 분으로 결국 사람들을 대신하여 속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하나 원망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주어진 고통을 묵묵히 참아 받으셨습니다.
애청자 여러분!
이런 분이 우리의 중재자가 되어 주시겠다는데 우리가 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우리를 위하여 그 어떤 모욕도 참아 받으셨는데 우리의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탓하시겠습니까? 문제는 우리 자신들의 이중성입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라는 귀로에서 우리는 아직도 이중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유다스처럼 곁으로는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하느님보다는 세상에 더 기대를 거는 그 이중성이 더 문제입니다. 올리브 동산에서 잠시라도 같이 있기를 간절히 요청하신 그리스도의 요구에 마음은 간절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거절하는 제자들 역시 아직 확고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단은 분명해 진 것 같습니다. 유다스의 이중성을 꼭 집어 "그것은 네 말이다"고 하셨던 그리스도의 지적에 따라 우리의 오늘 하루는 정말 나의 생각과 마음과 정성을 기우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를 택합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증하신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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