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자비를 통해 주시는 새로움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오늘의 전례 역시 지난 주일에 이어 하느님께서 용서와 자비를 통해 만들어 내시는 ‘새로움’에 관한 주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복음: 요한 8,1-11: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오늘 복음도 그리스도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으로 제시하면서 ‘새로운 소식’을 계시하고 있다. 이 새로운 소식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단죄하기를 바랬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늘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와 연속성이 있다. 단지 차이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주인공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데 있어서도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시라는 것이다(골로 1,15).
몇몇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그분께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3절)을 데리고 와서 심판해 주기를 요구했다. 모세법(레위 20,10; 신명 22,22)에 의하면 그 죄는 돌로 쳐 죽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예수의 심판은 단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요구가 순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고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고자 했다”(6절). 만일 죄를 용서해주라고 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고발할 수 있을 것이고, 단죄하는 경우에는 죄인들의 친구로 지내온 예수님께서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같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을 함정에 빠지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 대한 심판보다도 각자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심판을 해야할 것임을 보여주신다. 두 번이나 땅에 ‘쓰시는’(6.8절) 행동은 간교한 속셈으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법조문 자체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법의 근본정신을 읽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알아듣지 못했을까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7절) 하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린 것은 바로 이 말씀을 들은” 때였다(9절). 물론 그들은 간음죄가 아니더라도 어떤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떠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죄가 있다면 어떻게 우리 이웃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지 않겠느냐?”(루가 6,42). 그러기에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그분의 심판은 인간을 해방시켜 ‘새로운’ 정신으로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 이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10-11절).
예수님의 용서는 낭비적인 용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하도록 변화시키기 위해 용서하시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심판은 생명을 위한 심판으로써 단죄와 죽음만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들의 심판과는 다르다. 특히 용서와 사랑의 심판인 빠스카를 맞이할 우리는 남을 단죄하거나 서로를 단죄하는 유혹을 물리쳐 이김으로써 오직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그럼으로써 이 지상에 예루살렘을 건설하도록 하여야 한다.
제2독서: 필립 3,8-14: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의 체험이다. 하여간 그는 비록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한다. 바오로 사도는 그 길을 계속 달려간다. 또한 더욱 빨리 달려가기 위해 ‘대탈출’의 진정한 자세로써 겉꾸미는 과거의 모든 화려한 옷을 벗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따라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 안에서 그분과 일치를 이루면서 우리 안에 능력을 드러내실 그분의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10-11절).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새로운 것’은 빠스카의 신비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 사순절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신비를 재발견하도록 준비시켜주는 영역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기에 자신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9절). 이러한 관계에서만 우리는 주님께서 용서를 베푸시어 내면으로부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한 그 간음한 여인과 같이 주님 앞에 자유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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