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이사 43,16-21/ 필립 3,8-14/ 요한 8,1-11)
아직도 가끔 자동차 뒷유리에 “내 탓이요”라는 빛바랜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물질적 빈곤 퇴치를 넘어 부강한 나라로 발돋움하자고 현대화의 기치를 높이 쳐들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외적인 성장에 치중하다보니까 상대적으로 피폐화 된 사회 병리현상이 여기거지서 불거지고 그것들이 커다란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들의 원인은 그 누구의 책임에 앞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사회를 치유하고 정화하기 위해 “내 탓이요”라는 운동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사회의 제반 문제가 나로 부터 기인하고, 나의 이기주의적 생활 태도에서 비롯됨을 자각하자는 바른 사회 건설 운동을 가톨릭교회가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내 탓이요”라는 스티커를 차 뒷유리에 부착한다고 사람들이 비판을 마구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스티커를 보는 사람은 당해 차량이 아니라 뒤 따르는 자동차의 운전자이기 때문에 내 탓이라는 그 말은 “네 탓이요”처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항변도 그럴 듯하지만, 이 사회의 피폐화 되고 고착되어가는 제반 문제들의 심각성을 깨닫고 함께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치유하려는 생각이나 의지가 조금만 있었더라도 그런 식의 비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나 잘해”하며 잘 해보자고 나선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이나 하려하는 고약한 심사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아마도 그 운동에 정성을 다해 참여하였을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요한 8,7.9). 여수에서 친 아버지가 다섯 살 난 자신의 아이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바다에 던진 기막힌 사건소식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졌습니다. 그 천인공노할 애비는 재혼하려고 하니까 아이가 장애물처럼 여겨져서 그렇게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땅에 타인에 의한 경우를 차치하고서라도 자기 친부모에 의해 생명을 위협받는 저 가련한 아이들이 얼마나 됩니까? 이런 사회의 모습을 보고서도 우리가 아무런 탓이 없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오늘 이 자리에서 갖가지 사회 문제를 다 거론할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사회의 죄악을 접할 때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 탓의 결과라는 회심(悔心)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모든 죄와 죄벌의 용서를 받게 되지만 “죄의 불씨”라고 부르는, 죄로 기우는 경향은 그대로 우리 본성에 남아 있습니다(가톨릭 교리서 1264). 그래서 또다시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죄 없다고 외치고 싶지만 우린 분명 죄를 짓고 사는 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짓는 죄는 인류가 끊임없이 죄를 지음으로써 세력화시킨 그 죄의 세력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우리가 범하는 죄가 “세상의 죄”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깊이 성찰하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겠다고 살기등등(殺氣騰騰)하게 나섰다가, 돌을 그 자리에 놓고 맥없이 돌아서는 저 사람이 바로 우리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린 다시 한 번 “내 탓이요”라고 용기를 내어 죄를 고백하여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됩니다. 내가 먼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다면 우리 사회는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사회적 탓을 남에게 돌리려하면 할수록 우리 사회엔 어두운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지게 됩니다. 멱살 잡고 싸우기보다 먼저 내 탓이라고 고백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부터 회개합시다. 쉽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고해성사에 임할 때마다 경험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우린 고해성사 볼 때마다 “신부는 죄인에게 강복하소서.”라며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그려진 등장인물들 가운데 현재의 나는 어느 인물에 속하는 지도 한 번 깊게 반추해보면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좋은 묵상거리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겐 엄격한 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주님의 자비의 용서를 청하는 저 가련한 여인의 모습은 아닌지? 저 가련한 여인을 향한 주님 연민의 눈빛은 지금 진심으로 회개하는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린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는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