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딜레마는 똑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성적인 죄의 경우에는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즉 성(性)에 관련된 죄는 고해성사를 보고 나서도 다시 그 죄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육체의 연약성 때문이고 둘째는 악마의 부추김이고 셋째는 시대의 타락(오염)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性)에 관련된 죄는 자기 합리화를 하기 쉽고 또 부끄럽다는 감정 때문에 고백성사를 못하게 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감각을 흐려버리게 하기 때문에 최고로 무거운 죄이다.
노아의 홍수 때도 징벌의 직접적인 원인은 성의 문란이었고 소돔과 고모라의 몰락도 역시 성의 문란이었다. 이것은 양심의 가책도 없게 만들고 극도로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기 때문이 하느님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불경죄의 본바탕이다.
이 성적인 죄는 객관적인 판단능력을 상실케 해버린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죄를 빼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마태5,29)고 했겠는가?
예수님께서 성적인 죄에 대해서는 아주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하신다.
성적인 죄는 한번 짓게 되면 더욱 개발되고 깊어지기 때문에 본인의 이런 적극적인 대책 없이는 극복하기 힘들다.
우선 고해성사를 볼 때 성덕이 있는 한 신부님에게서만 보아야 한다. 부끄럽다고 이 신부님 저 신부님 찾아다니면 결국 그 죄를 극복하지 못하고 합리화해버린다. 또한 반드시 신부님의 성덕이 필요하다. 중죄인데 별거 아닌 것으로 지도하고 소죄는 죄가 아니라고 지도해버리면 그 영혼도 그 사제와 함께 망한다. 여기에는 희망이 없다. 사람은 자기가 편리한 쪽으로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성에 관련된 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영성생활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고해신부님이 중요하다.
다음은 나의 적극적인 대책이다.
인간은 예측의 능력이 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면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안다. 예방보다 더 강력한 효과는 없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죄의 기회를 피해야 한다. 죄의 기회를 피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서 ‘왜 나는 이렇게 약할까’ 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눈으로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이라면 밤늦게 인터넷이나 영화, 심야프로를 주의해야 한다. 성적인 죄는 우선 눈을 통해서 들어와서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사람에 애정에 애착이 많은 사람은 한가함을 피해야 한다. 한가함은 성적인 죄를 짓기에 가장 적당한 조건도 된다.
그 다음의 대책은 묵주기도이다. 묵주기도는 가장 탁월한 도움의 은총이다.
그런데 이 기도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호소한다. 당연하다 은총이 탁월하기 때문에 마귀의 방해가 가장 적극적인 교활함으로 온다. 우선 하품이 많이 나온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아주 좋은 징조이다. 그만큼 방해받고 있다는 뜻이므로 그 하품까지 성모님께 봉헌하면서 끈기 있게 기도하면 그 증상은 곧 사라지고 자신의 악습도 고쳐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음은 분심인데 추잡한 생각이 바로 떠올라 기도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것도 역시 좋은 징조이다. 그 기도의 은총 때문에 그 만큼 방해받고 있는 것인데 이것도 그 분심까지 봉헌하면서 끈기를 가지고 끝까지 기도를 다 하면 역시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묵주기도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엮어진 해방기도이다. 죄에서의 해방, 집착에서의 해방, 욕심에서의 해방을 이루게 해준다. 결국 가장 탁월하게 하느님을 찬미하게 해준다.
주님의 기도는 일곱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이고 성모송은 천사의 인사와 성령의 감도를 받은 엘리사벳의 기도와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졌는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인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묵주기도 마귀에게는 가장 치명적 기도가 된다.
생각해보라 성모송만 보더라도 성모송 중에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도다” 할 때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한 영인의 태안에 연약한 아기로 있다는 기도에 대해 교만한마귀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 뜻은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님 이라는 뜻인데 이 기도를 할 때 하느님보다 더 높이 되려했던 마귀는 설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게임을 끝난것이다. 이러니 이것을 50번 반복하는 묵주기도는 더구나 주님의 기도의 어우러진 묵주기도를 어떻게 버티겠는가?
묵주기도는 신뢰하며 바친 이 에게는 하느님의 구원을 눈으로 보겠지만 믿지 못하는 이에게는 지금 있는 것 마저 빼앗기게 된다.
하루에 묵주기도 5단도 하지 않고 천주교 신자로 머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나를 착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갖가지 것들을 통해(보통 선을 통해 오기 때문에 분별하기도 힘들다)끊임없이 속물이 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묵주기도를 하면 성모님의 겸손과 순결 그리고 순종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물들게 된다. 이런 순결한 상태로 모시는 성체성사야 말로 하느님의 강력한 힘이다.
인간은 넘어지면서 더 많은 교훈을 얻는다. 오늘 복음의 간음한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했지만 주님의 연민을 얻었고 용서를 얻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웃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에 의해 부끄러움을 당했다.
우리는 내 자신을 용서해야 되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나를 사랑해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믿어야 된다. 이웃사람들과 상관없이 하느님은 나에 대해 연민을 품고 계신다. 그 연민께서 다시는 그 죄를 짓지 말라고 요구하신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증과 주님께 대한 신뢰로 가능해진다.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영원한 것 생각 않으면 하찮은 것으로 만족해버리기 때문이다. 성서에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리는 에사오룰 보지 않는가?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죄와의 투쟁, 특히 성에 관련된 죄와 투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에 어렵게 보이지만 나를 만드신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고 성모님께서 함께 하신다. 이 투쟁은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영원한 지옥이냐의 문제이기에 포기해서도 적당히 해서도 안되는 문제이다.
아오구스티노 성인은 지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혼은 바로 간음죄라고 했다. 합리화의 명수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순결하게 살아야 세상은 희망이 있다. 우리가 정결하게 살아야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신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이 요청을 완성할 수 있게 해준다. 부디 받아들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