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사순 제 3 주간 화요일./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성호 신부님

2007. 3. 15. 오전 11:21:50

글자

다해 사순 제 3 주간 화요일.

2007. 3. 13.

토평동.

다니 3, 25.34-43.

마태 18, 21-35.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 21)

 

베드로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깨를 약간 으쓱였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한 사람이 잘못하면 보통 두세 번 정도 용서를 했고, 그러니 제 딴에는 쓴다고 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수난에 대해서 안 된다고 나섰다가 사탄이라고 꾸지람을 들은 것도 이참에 만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너에게 말하지만,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 18, 22 )

 

네가 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완전에 완전을 더해, 셀 수 없이 무한하게 용서를 해주어라.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무한하게 용서하라는 것이죠.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인가?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물음이 생깁니다. 한 개인이, 그것도 서로 믿고 있던 사람이 나에게 한 번이라도 잘못(여기서의 잘못은 작은 것뿐 아니라 아주 큰 죄까지도 포함한다)을 저지르면 그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되어있는데, 어떻게 그를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용서할 수 있는가? 이 용서의 커다란 난관은 잘못을 당해보고, 나를 해하는 죄를 겪어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내가 다른 이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원망과 분노’가 일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내가 함께 믿으며 살았던 형제적 관계에 있는 이들의 잘못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은 저 사람이 하고, 고통은 내가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 원망, 혐오는 나에게도 나쁜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도 힘든 것인데, 그것을 내가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중의 손해. 우리는 다른 이의 잘못으로 인해 이중의 고통, 이중의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당했을 때 보복하려는 마음은 늘 작용 반작용의 법칙처럼 나를 이끌어 나를 앙갚음의 길로 끌어가는 데, 그렇게 되기 전에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해결점을 역시 하느님의 자비에서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고, 그것은 받을 수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무한한 은총에서 나온 것이니 우리도 늘 그것을 상기하는 삶을 살고 그것에서부터 용서하는 마음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빚에 관한 비유’를 드십니다.

 

일만 탈렌트의 빚.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빚이지만, 그는 임금의 자비로 빚을 탕감 받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예수께서는 이야기의 극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나가서-나가자마자”(마태 18, 28) 그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방금 전 탕감을 받았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백 데나리온이면 가난한 일꾼에게는 큰돈이긴 해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던 첫 번째 종과는 달리 석 달 정도 안 먹고 모으면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아니면 다른 이에게 꾸어서라도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도 이 첫 번째 종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첫 번째 종이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그러고 싶지 않았다”(마태 18, 30)라고 말합니다. 본전 생각이 난 것일까요? 내가 빚진 것과 다른 이가 빚진 것을 생각해보면,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인데도, 그는 내가 탕감 받은 것은 생각지 않고 내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의 행동만 떨어뜨려 놓고 보면 그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조금 무정하기는 해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은 생각지 않고, 내가 준 것만 생각하는 모습. 예수께서는 이 예를 드시면서 그것이 흡사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함을 알아보셨을 것입니다. 용서하려고 하면, 무엇인가 내주려고 하면 할 수 있는데, 힘들더라도 주님께 받은 것을 생각하면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첫 번째 종의 경우처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용서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인데, 용서하려고 하는 마음조차 갖지 않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주인은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가두어둡니다. 주인이 노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토록 자비로웠던 왕이 노했던 것은 그가 당신의 자비를 무색케 했기 때문입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돈을 탕감해주었건만, 이 종은 동료의 푼돈(탕감 받은 돈에 비하면 이것은 새 발의 피!)마저 빼앗으려는 무자비함을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마치 당신은 바보요! 당신은 멍청이요! 라고 주인을 비웃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마무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우리가 대한 것처럼 우리를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는 우리를 하늘과 땅의 관계뿐만 아니라 수평적 관계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말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를 받은 그 교차점에서, 우리의 용서도 힘을 얻어, 다른 이들에게 용서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유는 용서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자유는 용서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죄를 짓는 우리가 아니라,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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