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제1 독서(신명 26,4-10)는 첫 수확의 결실은 하느님의 소유이기 때문에(탈출 22,28; 23,19l 34,26 참조)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례적인 신앙고백입니다. 떠돌이 신세(야곱)였던 때부터 이집트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가 하느님의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끌려나왔고, 역시 하느님의 손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자기들의 역사를 말하면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고, 이곳으로 데리고 오셨다는 표현(8-9)은 구원에 대한 구약성경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오늘 제2 독서(로마 10,8-13)는 유다인들의 편협한 구원관에 반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적인 의미를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정신은 외면하고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생각, 즉 자동적 구원관을 부정하면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수동적 구원관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이미 마음으로부터 동의가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인간이 되심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동의가 겉으로는 물론 마음속으로도 같이 이루어질 때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는 인정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4,1-13)은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악마와 논쟁을 벌이는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율법학자들과 탐욕에 빠질 때 생기는 죄악임을 암시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라는 표현 대신에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고 하면서 성령의 복음서라는 루가복음의 특성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지만(루카 3,21-22 참조) 예수님은 악마의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 유혹을 겪으셨다고 하는데 유혹이라는 의미는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이며, 유혹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유혹은 광야에서 겪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장소가 광야였다는 것은 호세아 예언자의 표현대로라면 매우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광야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다 사랑을 속삭이시기 위해 인간을 꾀어내서 데리고 가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호세 2,16-25 참조). 고통과 삭막함의 대명사인 광야는 인간이 버림받은 곳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우리가 거부해야 할 곳이 아니라 자주 찾아나서야 할 곳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수덕적인 훈련이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조건 광야를 거부하려 합니다. 그리고 첫째 유혹은 예수님을 모세와 대비시키면서(탈출 34,28)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았을 때 돌더러 빵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십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보속과 정화의 기간(신명 8,2 참조)을 말하며, 예수님께는 구약성경의 전통에 따라서 시험을 당하시면서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기간을 말합니다. 돌더러 빵이 되라는 유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분노를 자극하던 죄악을 말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그것을 잘 대변해줍니다.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사십 년 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이 해진 적이 없고, 너희 발이 부르튼 적이 없다. 너희는 마치 사람이 자기 아들을 단련시키듯,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단련시키신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아 두어야 한다.”(신명 8,2-5) 예수님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유혹을 물리치신 것은 이제 마지막 날에 당신 스스로 우리에게 먹힐 빵이 되실 것을 암시합니다. 둘째 유혹은 높은 곳에서 겪으셨다고 합니다. 갈릴래아로 가셔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셨음을 말해줍니다. 유혹의 내용은 예수님이 악마에게 경배하면 악마가 예수님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정치적 권력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정치가들의 행동에서,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의 행동에서 악마와 같은 짓거리를 많이 보셨기 때문에(루카 16,13) 그에 대한 대답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메시아로서의 정치적 권력이란 그야말로 미래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당신과 우리 모두의 일임을 확인해주십니다(다니 4,31; 7,14 참조). 참된 권세와 영광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누리실 것입니다. 셋째 유혹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유혹의 내용은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실 것을,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거기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셋째 유혹이야말로 예수님께는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를 갈라놓는 가장 심각한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은 초기교회의 신자들이 겪었던 유혹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그 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마싸에서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한 것처럼, 그분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신명 6,16)는 말씀으로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또한 세 번째 유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을 시험하고 분하게 만드셨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신명 9,7-29 참조). 루카복음에서 악마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고(루카 8,12 참조), 사람들을 소외시키고(루카 13,16), 짓누르고(사도 10,38), 예수님의 제자들을 체로 걸러냅니다(루카 22,31 참조). 악마의 체에 걸려든 사람이 바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입니다(루카 2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악마와 마귀들을 억누르는 힘을 지니셨습니다(루카 10,18; 13,16; 사도 10,38). 오늘 복음의 마지막 표현에서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3)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이 이 세 가지 외에도 많이 있었음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루카 22,28.39-46; 요한 6,15.26-34; 7,1-4; 히브 2,17; 4,15; 5,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사명을 완수하실 때까지 끊임없이 유혹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겪으셨지만 성령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났고, 광야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권력욕과 명예욕을 극복하심으로써 참 인간으로서 공생활을 하시면서 세상의 악을 이겨내야 하는 아픔을 미리 보여줍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에 대한 유혹은 항상 대단한 매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정치권력을 마약과 같다고 하며,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무서움을 느끼곤 합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꿈만 꾸는 사람들, 명예욕에 젖어있는 사람들, 자신이 잘났고 제일 똑똑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이런 권력에 대한 유혹은 더욱 더 많이 다가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의심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유혹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답답한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귀에 달콤한 소리를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시험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유혹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가 항상 조심해야 할 유혹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재물을 모음으로써 겪는 유혹과 아픔들이 얼마나 큰지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친교와 사랑의 힘을 보여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압력단체로, 정치적 힘을 과시하는 단체로 바뀔 때 얼마나 커다란 아픔이 동반될 것인지도 경험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교회가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은 강 건너 불 보듯이 빤한 것입니다. 이백 년 교회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제 와서 하느님 말씀에 젖어들 것을 강조하고 있음은 창피한 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유혹에 빠져서, 오늘 제1 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감사의 예물로 드려야 할 몫을 한 개인이, 또는 교회의 몇몇 사람들이 차지하려고 할 때 많은 이들이 뒤에서 엄청난 아픔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제2 독서의 말씀처럼, 마음에도 없는 신앙을 입으로만 고백할 때 교회가 얼마나 퇴보하고, 그런 공동체가 한두 사람의 인간적 힘에 내둘리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처럼 유혹의 손길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 그리고 악마는 나에게 들어와 남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강론] 사순 1주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7.02.24
2007. 2. 26. 오전 8:57:18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