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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일 2007년 2월 25일
루가 4, 1-13 오늘은 사순 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사순 시기는 부활 전 40일을 말합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부활축일을 앞두고는 사흘 동안 단식과 기도에 전념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고 부활하신 그분의 생명이 자기들 안에 흘러들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4세기 초에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이 사흘은 40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40일 동안 단식하고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였습니다. 유혹 받으신 장소를 ‘광야’, ‘높은 곳’,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 등으로 바꾸면서 이야기를 다채롭게 꾸몄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예수님이 평소에 겪으셨던 유혹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들이 살면서 또한 겪어야 하는 유혹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빵’이라는 말로 표현된 재물이고, ‘권세와 영광’이며, 또한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실제로 주신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악마는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탐하는 것을 주어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마르 14,38). 예수님은 “이 잔을 가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는 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 악마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 유혹의 이야기에서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먹고 사는 것, 곧 재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 신명기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그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 산다.”(8,3). 예수님은 먹거리로만 사는 인생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빌어 붙여서 재물을 얻어 소원 성취하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유혹의 두 번째 장면에는 악마가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보여주며 악마는 말합니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은 신명기(6,13)를 또 인용하여 답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인간은 권세와 영광을 얻을 수 있으면 비굴하게 행동합니다. 기쁨조 노릇을 하며 추태도 부립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소신도 버리고, 탈당, 창당, 입당을 예사로 하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봅니다. 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날렵하게 처신하고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는 엎드려 절합니다. 그 권력을 가진 자가 함량미달의 사람이라도 좋고 악마라도 좋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도 하느님에 대한 소신을 버리고 권력과 영광을 가진 사람에게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부귀와 영화를 탐하여 아무 데나 엎드려 절하지 않습니다. 악마는 세 번째로 예수님에게 권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신명기(6,16) 말씀을 또 인용하여 거절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인 것은 예수님 안에 초능력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람들이 시적을 많이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적 안에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기적하시는 예수님의 초능력이 아니라, 그분 안에 보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입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지, 먹거리나 권세와 영광 그리고 기적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인간이 탐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일이지, 하느님의 힘으로 해결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먹거리와 재물을 위해, 혹은 더 큰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 그리고 부귀영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하느님을 동원하여 그런 것을 얻어 내겠다는 유혹이 빠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특정 인물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어서 따로 데리고 놀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신앙인은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보겠다는 이기심의 유혹에 빠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의 따뜻함이 배여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 생명은 부모와 가족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재물도, 권세도, 초능력도 좋은 것이지만, 그 안에 하느님의 온기(溫氣)가 배어있지 있지 않으면, 인간 사이에 차별과 불화와 냉혹함을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차별과 냉혹함을 없애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의 온기를 우리의 삶 안에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무자비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무자비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고, 지키고, 바치기 위해 악을 쓰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류역사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의 온기를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상징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의 온기를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소원을 성취하겠다고 열심히 기도하고 권력과 영광을 얻어 보겠다고 비굴하게 엎드려서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은 초능력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일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자기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의 온기를 자기 주변에 살려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자녀로 사는 길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사순 제1주일 2007년 2월 25일 [강론]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2007. 2. 24. 오전 1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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